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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의 시선] 장기려 박사 사랑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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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의 시선] 장기려 박사 사랑의 실천

(서울=연합뉴스) 1995년 성탄절 새벽, 평생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인술을 베푼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가 세상을 떠났다. 자신은 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무의촌을 찾았고, 치료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 치료비를 대주며, 그나마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병원에서 몰래 도망가라고 문을 열어주었던 의사, 집 한 채 갖지 못하고 병원 옥상 사택에서 살았던 사람이었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며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냈으나 이산가족 상봉의 '특혜'는 거절했다.



장기려는 1911년 8월 14일 평안북도 용천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설립한 의성학교를 거쳐 1928년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32년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의전 외과학교실 백인제 교수의 조수로 의사생활을 시작했다. 백 교수는 장기려가 경성의전 외과학교실의 후계자로 남기를 바랐으나 그는 그 시절 엘리트 코스를 마다하고 평양으로 내려가 1940년 선교병원인 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 본격적으로 의사로 활동했다. 이는 경성의전 입학 당시 불쌍한 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치료비가 없어서 의사 얼굴 한번 못 보고 죽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했다. 같은 해 9월 일본 나고야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5년 11월 북한 제1 인민병원(평양도립병원) 원장, 1947년 평양의과대학 외과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으로 재직했다.
월남 후 1953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 1956년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 겸 학장, 1965년 서울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 1976년 부산아동병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간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수행해 업적을 남겼다. 간종양은 수술할 수 없다는 통념을 깨고 1943년 간상변부에 발생한 간암 환자에 대한 설상절제수술에 성공하고 결과를 조선의학회지에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1959년에는 한국 최초로 대량 간 절제수술을 해내는 등 당시 우리나라 외과 의사 가운데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간에 대한 연구로 1961년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받았으며, 1974년에는 한국간연구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장기려는 1932년 4월 9일 경성의전 선배인 내과 의사 김하식의 딸 김봉숙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결혼했다. 슬하에 6남매를 두었다.
그는 한국전쟁 초기 김일성대학 부속병원 의사로 근무했으나 북한군이 후퇴할 때 평양에 남아있다가 평양에서 운영되던 국군병원과 유엔민사처(UNCACK) 병원에서 일했다. 1950년 12월 3일 긴박한 전쟁통에 부인과 5남매와 헤어져 둘째 아들 장가용만 데리고 중공군에 밀려 철수하는 국군들을 따라 야전병원 앰뷸런스를 얻어타고 월남했다. 부산에 정착해 제3 육군병원 의사로 재직하는 한편 전쟁과 가난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 천막을 치고 의료구호사업을 시작했다. 1951년 7월 1일 경남구제위원회의 전영창과 한상동 목사의 요청으로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있는 제3 교회에서 무료진료기관인 복음병원을 설립했다. 장기려는 1976년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 재직했다.



장기려는 뛰어난 사회운동가의 면모도 보였다. 병원이 갈수록 커지고 무료 진료가 불가능해지자 장기려는 1968년 5월 한국 최초로 민간주도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다. 지금은 모든 국민이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고 있으나 그 당시는 가난한 사람들이 치료비가 없어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청십자의료보험은 정부 주도의 의료보험 도입으로 해산할 때까지 회원 수가 23만여 명에 이르렀다. 국가가 시행하는 의료보험 정책이 퍼지면서 1989년 6월 30일 회원들을 국가 의료보험에 귀속시키고, 설립된 지 21년 만에 발전적으로 해체됐다. 1975년에는 의료보험조합 직영의 청십자병원을 세웠다. 청십자병원에서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조합원으로 구성되어 무료에 가깝게 치료를 받았다.
1976년에는 청십자사회복지회를 설립하여 영세민 구호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장기려는 1979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는데, 상금 2만 달러는 청십자사회복지회에 기금으로 출연했다.
1969년 '간질환자회'를 설립하여 뇌전증(간질) 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 해소에 앞장섰고, 이를 토대로 이듬해 뇌전증 환자 치료모임인 '장미회'를 만들었다.
1978년 복지시설 거제도 애광원 후원회장이 됐으며, 1985년 한국장애자재활협회 부산지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지역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다. 이러한 공로로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 호암상 사회봉사 부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인도주의 실천 의사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장기려는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를 도우면 반드시 누군가가 북에 있는 가족을 도울 것이라고 믿었다. 이산가족의 일원으로 분단을 아파했고 가족을 그리워했지만, 1985년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의 기회를 주겠다고 했을 때 천만 이산가족을 내버려 두고 혼자 특혜를 받을 수 없다며 이를 마다했다.
1991년에는 미국의 친지로부터 북한에 가족이 살아 있다는 소식과 함께 부인의 편지와 가족사진을 받은 뒤 재회를 기다렸으나 끝내 가족과 만나지 못하고 1995년 12월 25일 새벽 서울 백병원에서 지병인 당뇨병으로 운명했다. 향년 86세.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 있다. 부인 김봉숙은 2004년 4월에 사망했다.



그는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 있는 성자,' '바보 의사'로 불렸다.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준 탓에 정년퇴임 후에도 살 집이 없어 복음병원의 후신 고신의료원이 병원 옥상에 마련해준 20여 평 관사에서 생활했다. 며느리가 시집올 때 예단으로 해온 이불조차도 고학생에게 주었다고 한다.
퇴임 후에도 자신이 명예원장으로 있는 부산 백병원, 청십자병원, 고신의료원 등에서 진료했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장기려는 의사가 된 동기를 "가난해서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는 하나님이 내리신 명령이라고 했다.
장기려는 경성의전 부속병원 근무 시절 척추결핵으로 입원했던 춘원 이광수의 주치의를 맡았는데, 춘원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의사 안빈의 실존모델로 알려졌다.
그는 평소 "사람 앞에는 어떤 이념도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무력도 경제력도 아닌 오직 사랑으로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고 말해왔고, "비문에 '주를 섬기다간 사람'이라고 적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의술로, 나아가 인술로 사랑을 심었다. 의롭지만 외롭고 고된 싸움이었다. 예수가 이 땅에 사랑을 전하기 위해 온 날 세상을 떠난 장기려. 헐벗고 가난한 이웃에게는 더욱 추운 세모에 온전한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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