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20년] 고용 불안정·소득 불평등 심화…풀지 못한 숙제들
임금근로자 3명 중 1명은 비정규직…사라진 평생직장
'자영업자 공화국' OECD 최상위권…커지는 소득 격차
"공정 거래 구조 확립하고 자영업 지원 필요"
(서울=연합뉴스) 강종훈 이도연 기자 = 1997년 발생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극복하면서 한국 경제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지만, 위기 극복 과정에서 발생한 고용의 불안정성과 소득 불평등 문제는 아직 풀지 못하고 있다.
외환위기 해결 과정에서 고용의 유연성이 강조되면서 비정규직이 급증했고 직장에서 밀려난 실직자들은 생계형 자영업자 문제를 키웠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임금근로자와 생계형 자영업자 등의 양극화로 소득 격차는 갈수록 확대됐다.
전문가들은 고용의 불안정성과 소득 불평등 문제를 풀지 못하면 한국 경제의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 없다며 공정한 거래 구조 확립과 자영업자 지원을 통해 외환위기가 남긴 숙제를 풀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외환위기가 남긴 최대의 부정적 영향은 비정규직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최근 실시한 인식조사를 보면 외환위기의 부정적 영향을 고스란히 엿볼수 있다.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천명이 참여한 조사에서 응답자 88.8%(복수 선택)는 외환위기가 현재 한국에 끼친 가장 큰 영향으로 비정규직 문제 증가를 꼽았다.
이외에 소득 격차·빈부 격차 확대 등 양극화 심화, 대량실직·청년실업 등 실업문제, 생계형 창업 증가로 인한 영세자영업 증가도 부정적인 영향으로 지적됐다.
일반적으로 비정규직 근로자는 정규직보다 훨씬 적은 고용 비용이 들고 인력관리의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어 기업들이 선호한다.
현대경제연구원 홍준표 연구위원은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전체적인 시스템이 변하면서 기업들이 쉽게 해고할 수 있게 됐다"며 "이로 인해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자영업자가 많아졌지만 실업급여 등의 지원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6년 43.2%이던 비정규직 비율은 외환위기를 거치며 1997년 45.7%, 1998년 46.9%, 1999년 51.6%, 2000년 52.1%로 치솟았다.
이후에도 금융위기 등으로 40%대를 웃돌던 비정규직 비율은 점차 하향세를 보여 지난 8월 기준 32.9%로 집계됐다.
그러나 여전히 주요 선진국과 비교하면 월등히 높은 수준이며, 정규직과의 임금 격차도 점점 벌어지고 있다.
자영업자 비중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상위권에 속한다.
국회예산정책처가 OECD 데이터를 기준으로 추정한 결과, 2015년 우리나라의 자영업자 비중은 21.4%로 OECD 평균(14.8%)보다 6.6%포인트 높았다.
우리나라보다 자영업 비중이 높은 나라는 그리스(30.8%), 멕시코(26.7%), 이탈리아(23.3%) 등 3곳뿐이었으며, 독일과 일본의 자영업자 비중은 각각 10.4%와 8.5%에 불과했다.
김복순 한국노동연구원 전문위원은 "임금근로자들의 은퇴 후 재취업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아 영세한 생계형 창업에 집중되고 있다"며 "숙련된 경험을 가진 인력을 활용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 상시 구조조정에 '사오정'·'오륙도' 속출
외환위기 이전 직장은 한번 입사하면 정년퇴직 때까지 다니는 곳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사라졌다.
기업에는 수시로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었고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직장에 다니면 도둑) 같은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 10월부터 2001년 4월까지 발생한 사용자 주도 이직(정리해고·권고사직·계약종료) 건수는 주요 기업에서만 171만건이었다.
외환위기 이전 1% 미만이었던 연평균 비자발적 이직비율은 외환위기 이후 7% 이상으로 증가했다.
비자발적 이직은 일시적 해고나 합병·구조조정·폐업으로 인한 해고, 근로계약기간 만료에 따른 면직 등을 의미한다.
비자발적 이직률은 1995년 10월∼1997년 10월 0.4∼1.0%였지만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10월∼1999년 10월 9.5%, 2000년 10월∼ 2001년 4월 8.9%를 기록했다.
평생직장이 사라지자 청년 구직자들은 정년이 보장되는 직업인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고 있다.
국가공무원 9급 공채 시험의 경우 올해 역대 최대인 22만8천368명이 지원해 45.5:1의 경쟁률을 나타냈다.
◇ 심화하는 소득 불평등…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 48% 차지
외환위기는 소득 불평등도 심화시켰다.
한국노동연구원 홍민기 연구위원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20세 이상 인구 중 최상위 10% 소득집단의 소득 비중은 1999년 32.9%에서 2015년 48.5%로 치솟았다.
반면에 2015년 1천만원 이하 소득자는 전체 소득자의 38.4%, 2천만원 이하는 59.5%를 차지했다.
홍 연구위원은 이처럼 하위 50%의 소득 비중이 낮은 이유를 미취업자와 저소득자가 많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그는 "미취업자, 실업자, 근로 빈곤층, 저소득자와 이 경계를 오가는 사람이 많아서 기업들은 임금을 크게 올리지 않고서도 일할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며 이들 계층의 저임금이 지속될 수 있는 배경을 설명했다.
홍 연구위원은 "낮은 고용률과 장시간 노동이라는 구조적인 문제, 세계화와 같은 시장조건, 노동 유연화와 같은 정책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면서 외환위기 이후 소득 불평등이 극심해졌다"고 덧붙였다.
◇ 공정거래 확립해 임금 격차 줄여야
전문가들은 소득 불평등과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으로 공정거래 구조 확립과 자영업자 지원책을 제시했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가 심해지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났다"며 "프랜차이즈,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원하청계약 구조가 공정한 방식으로 새롭게 구축되도록 하는 공정거래 차원의 해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청업체는 원청인 대기업과의 계약관계에서 불리한 조건에 놓여있을 때가 많고 이 둘 사이의 협상력 차이로 기업 간의 임금 격차가 발생한다. 임금 격차는 양극화와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조 교수는 "공정거래로 인한 낙수효과가 이어지면 경제의 선순환을 이끌 수 있다"며 "자영업 부문도 최저 임금 인상으로 구조조정을 하기보다는 산업 정책 개편으로 풀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생계형 자영업자가 늘어나고 경쟁이 치열해졌다"며 "생계형 자영업자들이 기회형 자영업자로 바뀌어 성장 동력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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