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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의 시선] 신연극 '은세계'와 한국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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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의 시선] 신연극 '은세계'와 한국 연극

(서울=연합뉴스) "대한신문사장 이인직(李人稙) 씨가 아국 연극을 개량하기 위하여 신연극을 야주현 전 협률사에 창설하고 재작일부터 개장하였는데 은세계(銀世界)라 제(題)한 소설로 창부(倡夫)를 교육하여 이 개월 후에는 해(該) 신연극을 설행한다는데 다중(衆多)한 창부 교육비가 거대하므로 기(基) 경비를 보조키 위하여 칠월 이십육 일로부터 이 개월간은 매일 하오 칠 시로 동 십이 시까지 영업적으로 아국에 고유하던 각종 연예를 설행한다더라." (황성신문 1908. 7. 28)

신소설 작가로 잘 알려진 이인직이 서울 광화문 신문로 야주현 협률사 자리에 원각사를 창설하고, 신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광대를 모아 연습을 시키는데, 경비가 많이 들어 이를 충당하기 위해 2개월간 전통연희 공연을 한다는 내용이다.





'은세계'는 원각사 개장 직후부터 약 3개월의 연습을 거쳐 11월 15일 막을 올렸다. 12월 1일까지 공연된 후 1914년 2월 17일부터 혁신단에서 다시 상연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연극이다. 이를 기점으로 우리나라에서 근대식 연극이 시작됐다.

창극 형태의 이 연극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몰입한 관객들이 극 중 벌어지는 사건을 현실로 착각하고 탐관오리의 횡포에 집단으로 항의하다 극장 밖으로 쫓겨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실내극장은 1902년 설치된 협률사이다. 황실극장 격으로, 고종 황제의 등극 40년을 맞아 칭경예식(稱慶禮式)을 거행하기 위해 세워졌다. 전통연희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으나, 현대적 개념의 창작 연극과는 거리가 멀었다. 독립된 서사 구조를 지난 단독 작품으로서의 연극의 출발은 '은세계' 공연으로 보아야 한다.

1907년 협률사가 폐지되고 그 자리에 관인구락부가 설치됐다. 관인구락부가 1908년 1월 남대문 쪽으로 이전하자 7월 26일 이인직, 김상천 등이 건물을 임대받아 그 자리에 원각사를 건립했다. 최초의 근대식 극장이다. 설립되자마자 명창 40명과 가기(歌妓) 24명을 모집, 전속 극단을 조직했다.

원각사는 붉은 벽돌로 된 2층 원형 건물로, 회전식 무대가 설치됐고 수용인원은 500~600명 정도였다. '은세계' 공연을 시작으로 주로 판소리, 민속무용 등 연희와 창극을 무대에 올렸다. 1909년 이후에는 극장으로 보다는 다목적 공간으로 사용됐다. 국민회 본부 사무실로 쓰였고 사회단체와 연회단체의 연설회장이나 연희장으로 빌려주기도 했다. 원각사는 1914년 봄 화재로 소실됐다.





신연극 '은세계'의 원작은 이인직이 발표한 같은 이름의 신소설이다. 1908년 11월 20일 동문사에서 출간됐다. 상권만 전하고, 하권의 발간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표지의 은(銀), 세(世), 계(界)라는 제목은 각각 신(新), 연(演), 극(劇)의 작은 글자를 모아 인쇄했다. 무대에 올릴 것을 염두에 두고 쓰인 것으로 보인다.

소설은 강원도에서 구전되던 '최병두타령'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릉에 사는 최병도라는 청년이 개화파 김옥균의 감화를 받아 구국의 일념을 품고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재물을 모았다. 그러나 가렴주구를 일삼던 강원도 관찰사인 정 감사에게 끌려가 재물을 모두 빼앗기고 곤장에 맞아 죽었다. 최병도의 부인은 충격으로 정신 이상이 되고 그의 자녀 옥순과 옥남 남매는 지인 김정수의 도움으로 미국유학을 떠난다. 남매는 갖은 고생 끝에 공부를 마치고 10여 년 만에 돌아와 어머니와 재회하고 어머니는 정신을 되찾는다. 이튿날 옥순과 옥남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명복을 빌러 절에 갔다가 의병들을 만나고 그들을 타이르다가 붙잡혀 가는 데서 이야기는 끝난다.

이 소설은 관리들의 학정과 이에 대한 백성들의 저항을 통해 반봉건 의식을 나타내고, 봉건질서와 개화사상의 대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전반부에 강렬한 저항정신이 표출된 것과는 달리 후반부에서는 외세 영합적인 태도가 나타낸다. 옥순과 옥남 남매가 고종의 강제 폐위를 옹호하는 모습이나, 순종 재위 시 일본이 주도한 '대개혁'에 감격하여 의병 활동을 비판하는 모습은 이완용의 비서였던 작가 이인직의 친일적 성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은세계'는 처음부터 '신연극'을 뚜렷이 표방했다. 신연극은 새로운 창작 대본에 따라 전통연희 담당자들에 의해 공연됐으며 애국, 계몽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때까지 고정 레퍼토리였던 판소리 다섯 마당에 식상해 있던 관중들은 현실적인 삶의 모습을 무대에서 보며 감동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공연 도중 최병도 역의 명창 김창환이 곤장에 맞아 죽어 나갈 때 관객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목에 엽전 꾸러미를 걸어주었을 정도로 극은 인기를 누렸다.

이인직은 1862년 경기도 음죽군(현 이천시)에서 출생, 1900년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정치학교를 다녔다. 1904년 일본 육군성 소속 한국어 통역관으로 발탁되어 러일전쟁에 종군했다. 친일단체 일진회에 들어가 기관지 국민신보 창간을 주도했고 이 신문의 주필로 활약했다. 이어 1906년 만세보를 창간하고 주필이 됐다. 1907년 만세보가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이완용의 후원으로 이 신문을 인수하여 대한신문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대한신문은 이완용 친일 내각의 선전지로, 이인직은 한일병합조약에 이르기까지 이완용의 하수인 역할을 수행했다. 1916년 사망했다.

원각사 설립 및 운영에 이인직이 관여됐고 작품 자체도 친일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서 이 공연을 한국 신연극의 효시로 보는 데 대해 비판도 제기된다. 그러나 이 공연은 분명히 전통연희 담당자들의 노력으로 새로운 시대상을 보여준 최초의 공연이었다.

곧바로 신파극이 들어왔고 이어 신극이 도입됐다. 신파극은 일본 가부키 형식에 서양의 멜로드라마를 조화시켜 새로운 시대 분위기를 반영한 과도기적인 연극이었다.

신극 운동은 토월회와 극예술연구회를 통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하나로 문화운동을 전개한 학생들은 연극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극예술협회는 1920년 봄 도쿄에서 김우진, 조명희 등이 조직한 극예술 연구 단체로, 신파조 형식에서 벗어나 시대를 담은 창작극을 공연하여 신극의 기반을 닦았다. 1923년 박승희, 김기진, 이서구, 안석주 등 도쿄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발족한 토월회는 순수문학 동호회로 출발했으나 방학 귀국 행사로 그해 7월 4일 조선극장에서 공연한 후 전문극단으로 전환했다. 1회 공연은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2회 공연부터는 성황을 이루어 연극계는 토월회의 독무대가 됐다. 토월회는 1926년 56회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산됐다. 1931년 외국 문학 전공의 도쿄 유학생들과 선배 연기인들이 모여 만든 극예술연구회는 극예술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넓히고, 기성극단의 상업주의에 따른 신파극 위주의 연극 풍토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 1935년에는 최초의 연극 전문극장 동양극장이 등장, 신극의 성장에 기여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어용화됐던 한국 연극은 8 ·15 해방과 더불어 생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 좌우대립이 연극에도 영향을 끼쳤다. 전쟁 후 1950년대에 극단 '신협'을 중심으로 한국 연극은 재건 ·정비기를 맞이했다.

1963년 설립된 한국연극협회는 회원 단체가 500여 개, 회원이 5만여 명에 이른다. 전국 16개 시도에 지회가 있으며 해외지부가 7개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2016년 문화향수실태조사'에 의하면 2015년 한 해 동안 연극공연 건수는 5천721회, 공연 횟수는 9만9천473회, 티켓 판매 수입은 729억 원이다.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낸 것 같지만, 연극인들의 형편은 그리 좋지 못하다. 실제로 공연 횟수와 일수 모두 감소하는 추세이며 대학로에서 대학로를 상징하던 연극도 하나둘 떠나고 있다.

연극계 종사자의 절반 이상이 월 소득이 100만 원 미만이라는 조사도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설문조사에서 월수입이 50만 원에서 100만 원이 30.9%, 50만 원 미만이 25.2%였고 응답자의 39.7%만이 고정적으로 단체에 소속돼있었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 의하면, 2014년 4월부터 2017년 8월까지 임금 미지급 신고 건수가 총 416건, 액수는 22억2천여만 원인데 장르별로는 연극 분야가 197건(47.4%)으로 임금체불이 가장 심각하다.

'은세계'가 공연된 지 내년이면 110년이 된다. 연극은 시대의 거울이다. 험난한 시절, 고된 현실 속에서 열정을 쏟았던 선구 연극인들, 여전히 힘든 환경 속에서도 예술혼을 사르고 있는 오늘날의 연극인들, 그리고 연극을 보며 웃고 울고, 삶의 위안을 얻었던 관객들. 이들이 함께 만들어 낸 한국 연극의 내일을 위해 계속 관심과 사랑, 지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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