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비리기관 해부] 학자금에 의료비까지…복리후생 수준도 월등
평균 연 350만원…타 공공기관 대비 43% 많아
"불필요한 공공기관 지정 해제하고 꼭 필요한 기관은 자율성 줘야"
(세종=연합뉴스) 정책팀 = 채용비리는 취업준비생이 품은 청운의 꿈을 짓밟는다는 점에서 악질적인 행위다.
공정한 심사를 통해 채용이 이뤄진다는 신뢰를 좀먹으며 또 다른 채용비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채용비리가 특히 공공기관에 곰팡이처럼 번지는 이유는 고용 안정성·임금·복지 등 여러 측면에서 민간기업보다 괜찮은 일자리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문성과 거리가 먼 정치인이나 관료가 이른바 '낙하산'으로 수뇌부를 차지하면서 각종 외압에 취약해지는 점도 채용비리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채용비리에 엄정한 대응을 주문하면서도 최근 정부가 발표한 전수조사 계획이 '보여주기'식 대응에 그칠 수 있다며 우려했다.
필요하지 않은 공공기관은 해체하고, 꼭 필요한 기관은 오히려 자율성을 부여해 효율적 운영을 지원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 상당수 채용비리기관, 복리후생비 '최상위권'
3일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알리오)에 따르면 감사원이 채용비리를 적발했거나 국정감사 등을 통해 채용비리 의혹이 제기된 23개 공공기관 중 상당수는 복리후생비 규모가 공공기관 중에서도 최상위권이었다.
23개 기관의 지난해 1인당 평균 복리후생비는 350만4천원으로 전체 353개 공공기관(부설기관 포함) 평균(244만8천원) 보다 43%(105만6천원) 많았다.
기관별로 봐도 채용비리에 연루된 공공기관 상당수는 다른 공공기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복지 지원을 받고 있다.
청탁지원자가 6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 강원랜드는 1인당 복리후생비가 479만7천원으로 전체 353개 기관 중 6위였다.
특히 복리후생비 항목 중 복지포인트 등을 통한 선택적 복지 규모는 291만8천원에 달해 전체 공공기관 중 3위를 차지했다.
삼성 출신 인사 채용 과정에서 특혜를 준 의혹이 제기된 한국마사회는 1인당 복리후생비가 453만8천원으로 10위에 올랐다.
항목별로 보면 기념품비가 무려 126만4천원으로 전체 공공기관 중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의료비는 84만4천원을 지원받아 분당서울대병원(1위), 서울대병원(2위) 등 의료기관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이들 병원을 제외하면 사실상 1위였다.
문화여가비는 한국지역난방공사(48만8천원·3위), 한전KDN(42만6천원·5위), 한국토지주택공사(41만2천원·6위), 부산항만공사(37만8천원·8위) 등 상위 10개 기관 중 무려 4개 기관이 채용비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면접 점수를 고쳐 전 사장의 조카를 채용한 한국석탄공사는 학자금 지원액이 연간 145만6천원으로 전체 공공기관 중 4위를 차지했다.
역시 면접 점수를 고쳐 사장 후보를 추천한 한국서부발전의 보육비(62만6천원) 지원 규모는 공공기관 중 7위, 재해보상금(29만4천원)은 9위였다.
높은 복지 수준은 그 자체로 바람직하지만 그만큼 높은 비리 유인이 되기도 한다.
공공기관은 복지 뿐 아니라 급여와 근속연수에서도 민간기업보다 더 좋은 대우를 보장한다. '신의 직장'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 채용비리 의혹 공공기관 절반 이상 수장이 '낙하산'
공공기관 채용비리의 또 다른 축은 '정·관계 낙하산'이다.
한 기업의 수장은 해당 분야에 대한 높은 이해와 원숙한 경험을 가진 전문가가 맡아야 한다.
하지만 공공기관 수뇌부에는 그와는 거리가 먼 정치인이나 감독기관에 있었던 관료가 임명되는 일이 잦다.
이러한 낙하산은 조직 내 틈을 넓히면서 각종 외압에 취약한 구조를 유발한다.
실제로 분석 대상 채용비리 의혹 23개 공공기관 중 절반(52.2%)이 넘는 12개 기관의 전·현직 기관장이 낙하산으로 분류됐다.
낙하산 대부분은 '관피아(관료+마피아)'였다. 전체의 39.1%인 9명이 관피아로 분류됐다.
감사원이 과장급 직원 문책을 요구한 한국전력공사의 조환익 사장은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을 역임하는 등 고위 관료 출신이다. 최근 3연임에 성공했다.
2015년 취임한 우예종 부산항만공사 사장은 해양수산부 기획조정실장을 맡다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퇴직했던 인물이다.
'정피아(정치권 인사+마피아)'로 분류될 수 있는 인물은 3명(13.0%)이다.
채용비리 백화점이라는 오명을 안은 강원랜드 함승희 사장은 '친박연대' 출신 국회의원이었다.
2013년부터 올해까지 한국도로공사의 수장이었던 김학송 사장은 16∼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채용비리 의혹 공공기관 수장이 공채 출신인 경우는 3곳에 불과했다.
낙하산 기관장들은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 준 인맥의 청탁을 거절하지 못해 채용비리에 직접 연루될 가능성이 크다.
본인이 직접 연루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채용비리를 막아낼 내부 시스템을 다질 만한 역량이나 의욕이 없을 수도 있다.
◇ "불필요한 공공기관 해체하고 필요한 기관은 자율성 줘야"
전문가들은 괜찮은 처우와 낙하산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공공기관 채용비리를 불러온 것으로 보고 있다.
처우가 좋다는 점만으로는 채용비리를 설명할 수는 없다. 처우가 나쁘지 않은 민간기업 채용에 대한 신뢰는 공공기관만큼 바닥을 치지는 않는다.
법적으로 높은 수익성을 보장받고 있으므로 스스로 좋은 인재를 채용할 유인이 적고, 기관장 역시 능력보다는 연줄에 좌우되는 상황에서 채용비리가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실상 효용 가치가 작은 공공기관을 분류해 해체하는 '존재 타당성 분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불필요한 공공기관은 타당성 분석을 통해 해체해야 한다. 반면 꼭 필요한 기관은 오히려 자율성을 더 줘서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고경영자(CEO) 뿐만 아니라 공공기관의 운영을 감시해야 할 감사마저 낙하산 출신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아 채용비리가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비화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철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실장은 "상임감사는 채용 관리와 경영의 견제 역할을 하는 보직인데 낙하산이 많아 제대로 대처를 못 하고 있다"며 "감사 낙하산을 근절하는 것이 채용비리를 막는 제도적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채용비리에 엄정한 대응이 필요하지만 정부가 계획한 전수조사 방식은 공공기관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보여주기'에 불과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상당수 기관이 소규모이고 채용비리와 무관함에도 전수조사를 하게 되면 정부 뿐만 아니라 공공기관 역시 업무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김태윤 교수는 "공공기관으로부터 자진 신고를 받고 신고를 누락한 곳을 조사해 엄벌에 처하면 행정력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라며 "채용비리는 근절해야 하지만 보여주기 식으로 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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