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정지우 감독 "제 작품의 공통점요? 쓸쓸함이 아닐까요"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세 남녀의 얽히고설킨 애증을 그린 치정극 '해피엔드'(1999),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바람둥이 남자가 첫눈에 반한 여자의 뒤를 쫓는 과정을 그린 '모던 보이'(2008), 70대 노인과 10대 여고생의 금지된 사랑을 그린 '은교'(2012), 1등만을 기억하는 교육 현실과 체벌의 문제를 다룬 '4등'(2016)까지.
정지우(49) 감독의 작품 세계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남녀 간의 사랑과 사회적 금기에 대한 도전 등이 담겨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최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 감독은 그의 작품의 공통된 키워드로 '쓸쓸함'을 꼽았다. "주인공이 굉장히 쓸쓸해진다는 점,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섰을 때 쓸쓸한 정서가 오랫동안 남는다는 점이 공통점인 것 같아요."
지난 2일 개봉한 그의 신작 '침묵'역시 한 중년 남자의 쓸쓸한 눈빛이 뇌리에 남는 영화다.
돈과 명예를 모두 가진 재벌총수 임태산(최민식 분)이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인생 최대의 위기를 그만의 방식으로 헤쳐나가는 이야기다. 법정 드라마라는 외피 속에 임태산의 약혼녀를 살해한 진범이 누군지를 두고 치열한 진실게임이 펼쳐진다.
정 감독은 "사실과 진실 사이를 넘나들며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인터넷에 떠도는 동영상, 녹취의 일부만으로 상황이나 한 인간의 전체를 규정하기도 하죠. 그러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린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이라고 확정 지을 수는 없잖아요. 조금 더 깊게, 넓게 봐야 알 수 있죠."
전작들에서 인간의 통속적인 욕망과 복잡다단한 감정을 파고들었던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감정묘사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돈이 곧 진실'이라고 믿는 임태산이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린 뒤 겪는 심경 변화를 그려냈다. 그의 감정의 변곡점은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조금씩 관객의 마음속에 스며 변화를 암시하다가 후반부 '강력한 한방'을 보여주며 연민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최민식이라는 배우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신뢰로 만들어졌다. 정 감독은 데뷔작 '해피엔드' 이후 18년 만에 최민식과 함께 호흡을 맞췄다. 정 감독은 "최민식이라는 그릇이 있었기에 이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 TV에서 재방송된 드라마 '서울의 달'을 보니 최민식 선배님이 진짜 귀여운 소년처럼 보였어요. 그에 비하면 18년 전 '해피엔드'때는 청년이었죠. '침묵'에서는 중년이라기보다 어른이 된 것 같아요. 지금 모습으로 '해피엔드'를 찍었다면 더 깊은 울림이 있겠구나 생각했죠."
'침묵'에는 이하늬와 박신혜, 류준열, 이수경 등 요즘 잘나가는 젊은 배우들도 여럿 등장한다.
정 감독은 "이하늬의 단점은 재주가 너무 많다는 것"이라며 "연기를 잘하는데, 다른 재주 때문에 그의 연기가 지금까지 가려져 있었다"며 역설적인 표현으로 칭찬했다. 박신혜에 대해선 "굉장히 바른 느낌을 주는 배우로, 정의로운 변호사 캐릭터와 잘 맞아떨어졌다"고 평했고, 임태산의 딸을 연기한 이수경은 "선배 배우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연기를 보여줬다"고 치켜세웠다.
정 감독은 '해피엔드'로 전도연의 새로운 모습을 끌어냈고, '은교'의 김고은, '4등'의 박해준·정가람 등을 발굴했다.
그는 "신인 배우가 주는 기운, 열정과 집중이 너무 좋다"면서 "그래서 새로운 배우들을 기용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정 감독은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사이에서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작품을 내놓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저는 상업영화라는 나무에 아직은 매달려있는 감독"이라며 "그 나무 위에 완전히 올라타는 것은 노력해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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