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발견된 벙커, 전시장 변신…개관전 '여의도의 모더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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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이마가 살짝 드러나기 시작한 중년의 남자가 표범 무늬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쉼 없이 말을 한다. "한 잔 마셔"라며 호쾌하게 권하기도 한다.
영상 속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은 박정희 전 대통령, 아니 배우 이창환(65)이다. 그는 1995년 MBC TV 드라마 '제4공화국'을 시작으로 많은 작품에서 박 전 대통령으로 분했다.
이창환 개인과 이창환이 연기하는 박 전 대통령 모습을 담은 윤지원 작가의 영상 작품 '나, 박정희, 벙커'가 상영되는 곳은 2005년 서울 여의도 버스환승센터 건립 공사 중에 발견된 지하벙커의 VIP실이다.
이 벙커를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1977년 즈음에 완공돼 박 전 대통령과 정부 요인들의 유사시 대피 공간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벙커 위 지상에서는 40년 전만 해도 박정희 정권의 대규모 선전 행사가 열리곤 했다.
그 이력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벙커가 내부 손질을 거쳐 서울시립미술관(SeMA)이 운영하는 문화예술공간, SeMA 벙커로 탈바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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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여의도 IFC 바로 앞에 설치된 계단을 통해 벙커로 내려가자 항온항습 설비에도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당시 타일과 양변기, 거울 등이 온전히 제 모습을 간직한 VIP실에서는 '나, 박정희, 벙커' 상영이 한창이었다. 누런 때가 묻은 환풍구만이 40년의 세월을 넌지시 알려줄 뿐이었다.
윤지원 작가는 '지하벙커'와 '박정희'가 오늘날 우리에게 "온전히 밖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완전히 도려낼 수 없는 무의식"이라고 봤다. 30분 길이의 영상은 우리에게 그 흔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물음을 던진다.
'나, 박정희, 벙커'는 이날 개막한 개관 기획전에 출품된 작품 중 하나다. VIP실 옆 넓은 공간에서는 여의도를 중심으로 한국의 근현대화를 담은 전시 '여의도 모더니티'가 열린다.
'여의도 모더니티'는 양아치 작가가 기획하고 강예린, 진종헌, 신경섭, 김남수, 이나현, 유빈댄스, 송명규, 윤율리, 이유미, 조인철, 박정근 등 11명의 작가가 4팀으로 나눠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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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율리, 이유미 작가가 손잡은 '할로미늄 여의도 베이스먼트'는 흰색 예비군복을 즉석에서 만들어 판매하면서 군사 산업의 모더니티를 들여다본다.
박정근·조인철 작가의 '교차점'은 남자의 턱과 손, 입 등 신체 일부를 촬영한 사진들을 보리건빵 포대와 야전침대 사이에 늘어놓고 음악을 깔아놓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몸짓과 손짓은 수십 년간 여의도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던 정치인임을 떠올리게 한다.
신경섭·강예린 작가는 '왜 우리는 벙커가 공원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가'에서 비행장 활주로에서 5·16 광장으로, 다시 공원으로 변모해온 여의도 공원을 사진 이미지로 드러낸다.
전시는 11월 26일까지. 문의 ☎ 02-2124-8928.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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