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왕양, 상무부총리 후보로 급부상…시진핑 경제외교 보좌할듯
'젊은 개혁파'로 꼽혀…실무행정능력 진가 발휘 시진핑 신임
(상하이=연합뉴스) 정주호 특파원 = 시진핑(習近平) 집권 2기의 중국 경제외교 주도권이 차기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이 유력시되는 왕양(汪洋) 국무원 부총리에게 넘겨질 가능성이 커졌다.
왕 부총리는 최근 중국 내외 소식통과 외신들이 전하는 차기 정치국 상무위원 명단에 거의 빠짐없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18일 개막되는 제19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를 앞두고서 왕 부총리가 미국, 파키스탄, 러시아 등을 방문한 것은 이미 차기 지도부에서 역할이 확정됐다는 신호로 여겨진다.
이렇게 되면 퇴임을 앞둔 장가오리(張高麗) 상무부총리를 교체해 같은 계파 출신의 리커창(李克强) 총리와 함께 시 주석의 경제정책 전반을 보좌하게 될 것으로 관측된다.
왕 부총리는 시 주석이 다소 경원시하는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의 퇀파이(團派)이면서도 지난 5년간 여러 요직에 중용됐고 시 주석의 해외 순방을 수행해 국제 외교무대에 선을 보였다.
62세의 왕 부총리는 중국 정가에서 비교적 젊고 전도유망한 인물로 꼽힌다. 연령상 우위를 빼고도 왕 부총리는 출사 이후 별다른 굴곡없이 행정경력을 완비하고 능력을 인정받았다.
퇀파이라고 하지만 자신과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의 고향인 안후이(安徽)성의 공청단에서 20대 초반에 활동한 것이 전부다.
안후이성 쑤저우(宿州)시 출신의 왕양은 44세인 1999년 주룽지(朱鎔基) 총리 시기에 국가발전계획위원회 부주임을 지낸 다음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시기였던 48세엔 국무원 부비서장, 50세엔 충칭(重慶)시 서기, 52세엔 광둥(廣東)성 서기로 승승장구했다.
2007년 17차 당대회 직후 17기 1중전회에서 왕양은 정치국 위원에 선임되는 데 그쳤다. 당시 정치국 상무위원까지 오르지 못한 것은 당내 계파간 힘겨루기의 희생양이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2012년 시 주석이 집권한 이후에도 왕양은 리커창(李克强) 총리 아래 네명의 부총리 가운데 서열 3위의 부총리로 지명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왕 부총리는 정치국 상무위원인 장가오리 상무부총리를 제치고 시 주석이 다방면에 걸쳐 정책실행을 의존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왕 부총리는 농업, 수리, 홍수가뭄방지, 상무, 관광, 대외무역 분야를 분담하며 국무원 탈빈곤개발영도소조 조장으로서 시 주석이 주창하는 빈곤탈출 사업을 맡기에 이르렀다.
탈빈곤은 시 주석이 지난 5년간 30차례의 지방시찰 가운데 25차례나 언급했을 정도로 중시하는 정책이다. 시 주석은 2015년 회의에서 "빈곤 제거, 민생 개선, 공동 부유 실현은 사회주의 본질적 요구로 당의 중요한 사명"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시 주석은 또 대외협상 창구를 왕 부총리로 일원화하기도 했다.
지난 7월 왕 부총리를 단장으로 한 중국 대표단이 미국 워싱턴에서 첫 미중 경제대화를 진행했다. 이는 시 주석이 4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갖고서 정한 미중관계의 핵심 프레임중 하나였다.
시 주석이 2013년 집권후 처음으로 해외방문에 나서 러시아를 갔을 때에도 왕 부총리가 수행자였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도 시 주석은 왕 부총리를 옆에 항상 배석시켰다.
지난 9월 러시아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왕 부총리의 중러 관계에 대한 공헌을 칭송하며 우호훈장을 수여하도록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에 따라 중국 전문가들은 현재 북한 핵·미사일 도발과 동북아 정세 불안 속에 미중러 3국간 관계가 갈수록 복잡해지는 상황에서 왕 부총리가 맡은 역할은 시 주석에게 '맹우'를 찾아주는 역할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시 주석의 신임 외에도 과거 왕 부총리의 지방 재직시 정책방향도 시 주석의 생각과 부합한다는 측면이 있다. 왕 부총리가 광둥성 서기로 재직할 당시 추진한 등롱환조(騰籠換鳥·설비기술의 농촌 이전을 통해 새로운 첨단산업을 육성하는 산업구조 고도화 전략)는 시 주석이 2002년 저장(浙江)성 서기 시절에 제시한 개념이었다.
이를 통해 이후 주장(珠江) 삼각주지역이 가공산업에서 첨단 IT산업 지대로 변신하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관료풍 냄새를 풍기지 않고 과감한 개혁을 주창하는 모습은 왕 부총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왕 부총리는 충칭, 광둥 재직시 주장한 여론에 의한 행정감독, 사회단체 등록절차의 간소화, 호적제도 개혁, 도농격차 타파 등은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이중에서도 왕 부총리가 2011년 공산당 창당 90주년에 즈음해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서기와 벌인 공개 설전이 유명하다. 보시라이가 충칭에서 혁명가요 제창과 함께 좌파 노선을 부르짖는 '홍색 캠페인'을 벌이자 왕양은 "위기 의식을 키우는 것이 노래를 부르는 일보다 훨씬 공산당 장기집권에 유리하다"고 반박했다.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이들은 앞서 "케이크는 먼저 공평하게 나눠야 더 커질 수 있다"(보시라이), "케이크를 키우는데 중점을 둬야지, 케이크를 나누는 것은 핵심 업무가 아니다"(왕양) 등의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시라이는 18차 당대회 직전 낙마했고 왕양도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대담한 발언이 설화에 휩싸인 적도 있다. 왕 부총리는 2013년 7월 5차 미중 전략경제대회에서 미중 경제관계를 당시 루퍼트 머독 부부에 빗대 설명하면서 "머독과 덩원디(鄧文迪)처럼 이혼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중국 매체들은 '위트있는 유머'라고 찬사했으나 중국 지도부 일각에서 "나라를 대표한 활동은 개인이 박수를 받고 웃음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지적과 함께 자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 일을 계기로 왕 부총리의 업무 태도는 다소 변화를 겪었다. 공개 활동이 다소 줄었지만 시 주석의 신임은 더욱 강해졌다.
정치국 상무위원에 대한 7상8하(七上八下·67세는 유임하고 68세는 은퇴한다) 내규에 따라 왕 부총리가 이번에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오르게 되면 권력핵심에서 추가로 10년을 앉아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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