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거장이 버려진 병뚜껑으로 직조한 역사와 기억
가나 출신 세계적 작가 아나추이, 바라캇서울서 첫 국내 개인전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2007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팔라초 포르투니 미술관을 휘감은 거대한 천이 베니스비엔날레를 찾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화려한 황금빛 천의 정체가 수천 개의 병뚜껑을 금속 끈으로 엮어 짜낸 태피스트리라는 사실에 많은 관람객이 경탄했다.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 '프레시 앤드 페이딩 메모리스'(Fresh and Fading Memories)는 가나에서 태어나 나이지리아에서 활동하면서 아프리카를 떠나본 적이 없었던 엘 아나추이(73)가 '재발견'되는 계기가 됐다.
지난 10년 사이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의 작품은 이제 영국박물관, 퐁피두 센터, 테이트모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등 유수 미술기관의 소장 목록에 올라 있다. 국내에서는 삼성미술관 리움에 작품 1점이 있다.
세계적 권위의 상도 아나추이를 연이어 호명하고 있다. 그는 2015년 아프리카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평생공로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내달 18일에는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예술가에게 선사하는 프리미엄 임페리얼 국제 예술상도 받을 예정이다.
국내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왔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전시공간인 바라캇서울에서 아나추이의 국내 첫 개인전 '엘 아나추이: 관용의 토폴로지'가 27일 개막한다. 대표작인 금속 태피스트리 3점과 근작인 판화 6점을 비롯해 9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전시 개막을 맞아 한국을 찾은 작가는 26일 간담회에서 유년의 기억부터 꺼냈다. 황금과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던 가나는 식민지배 역사를 거쳐 1957년 독립했다. 그의 나이 13살 때였다.
"식민지였기에 서구 문화를 가르치지, 아프리카 자체 문화를 가르치지 않았어요. 성장한 뒤 대학에서 예술을 전공하면서 제가 받았던 교육에서 무엇인가 '빠진' 것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콘텐츠, 문화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작가는 초창기에 아프리카인들이 음식을 나눌 때 사용하는 납작한 나무 접시를 활용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후 그의 관심은 병뚜껑으로 옮겨갔다. 그는 교편을 잡았던 나이지리아의 작은 마을 느슈카(Nsukka)에서 소비된 수천 개의 병뚜껑을 가공해 금속 태피스트리를 만들어 냈다.
작가는 손길이 닿은 물건에는 그 사람의 DNA 혹은 에너지가 남는다고 믿는다. "버려진 물건들과 이를 활용해 만든 작품을 통해 사람과 사람 간에 연결고리가 생겨나요. 일종의 역사, 이야기가 남아있기에 서로 연결되는 것이죠."
버려진 위스키 뚜껑은 서구에 의해 아프리카에 술이 공급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노예 제도와 식민 시대를 관통하는 아프리카의 근현대사가 응축된 작품인 셈이다.
수천, 수만 개의 병뚜껑을 수집하고 운반하는 과정에서 마을 주민의 참여를 끌어낸다는 점도 아나추이의 작품에서 읽을 때 주목해야 하는 점이다.
박소현 바라캇서울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를 두고 "한국이라는 맥락 속에서 어떻게 새롭게 소개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서구 중심의 현대미술계에서는 아프리카 출신이라는 지정학적인 측면만 강조됐는데 그 점에서 벗어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11월 26일까지. 문의 ☎ 02-730-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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