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 폭염 늦장마에 우박…풍년가 사라진 추석 농심 '시름'
벼 더디게 여물고 수확 감소…이상기후에 작황 나빠 농민들 한숨
탄저병·홍수출하로 값 떨어진 사과·배 설상가상 우박에 초토화
(전국종합=연합뉴스) 국내 최대 쌀 재배단지인 충남 서산시 부석면 천수만 AB지구의 올해 '농사 시계'는 한 달 이상 늦게 돌아간다. 황금빛으로 변했어야 할 논은 이제 겨우 이삭을 내민 벼가 푸릇푸릇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마음 급한 농부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논의 물꼬를 돌보고 벼의 상태를 살피느라 분주하다.
추석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지만, 벼가 여물지 않은 천수만 간척지에는 풍요로움이 없다.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돌면서 계절의 변화를 걱정하는 농민의 한숨 소리만 깊어가고 있다.
◇ 늦은 모내기·일사량 부족…벼 생산량 평년 밑돌 듯
바다를 매립한 이곳은 올봄 극심한 가뭄으로 논바닥 염분 농도가 영농 한계치(2천800ppm)에 다다르면서 어린 모 상당수가 말라 죽었다.
농부들은 장마가 시작된 7월이 돼서야 가까스로 2차 모내기를 했지만, 곧바로 시작된 폭염과 궂은 날씨로 인해 생육이 더딘 상태다.
이우열(72) AB지구 경작자 협의회장은 "2차 모내기가 이뤄진 땅이 전체 간척지의 절반에 육박한다"며 "요즘처럼 청명한 날씨가 앞으로 한 달가량 이어진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 벼 수확이 힘들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가뭄과 폭염, 늦장마가 뒤섞인 변덕스러운 날씨로 인해 풍년가가 흘러나와야 할 농촌의 추석 분위기가 무겁다. 햇볕을 충분히 받지 못한 벼는 낱알이 제대로 맺지 않았고, 과일과 채소도 병에 걸리거나 물러 터져 작황이 예년만 못하다.
전문가들은 올해 벼 수확량이 작년보다 3∼4%가량 떨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기상여건에 따라 지역적인 편차도 커 가뭄이 극심했던 충남 서해안은 10% 가까이 빠질 가능성도 있다.
박병희 충남도 농정국장은 "올해 모내기가 한 달 가까이 늦어진 데다, 이삭이 팰 무렵 늦장마로 일사량도 크게 줄었다"며 "천수만 A지구는 20∼30%, B지구는 50% 이상 벼 생산이 줄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비가 덜 내린 남부지역은 작년과 비슷한 수확이 예상된다. 경남의 경우 조생종 벼의 80%가량을 수확했는데, 10a당 생산량이 516㎏로 작년(517㎏)과 비슷하다.
박홍재 농촌진흥청 식량기술지원단 지도관은 "일사량이 부족했던 중부지방 벼 작황은 작년에 못 미치지만, 전남·북과 경남 등 남부지역은 작년 수준에 육박한다"며 "앞으로 한 달가량 기상여건만 받쳐준다면 평년작(10a당 522㎏) 수준으로 올라설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 사과 탄저병 피해 심각, 홍수 출하로 배값 곤두박질
과일 작황도 여의치 않다. 전국 최대 사과 산지인 경북 안동에서는 이달 초 습한 기후 속에 탄저병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면서 애써 키운 사과를 절반 가까이 폐기한 농가가 수두룩하다.
탄저병은 과일 표면에 갈색 반점이 생기면서 과육이 움푹움푹 썩어들어가는 병이다. 병원균이 주로 빗물을 타고 번지기 때문에 수확기 내리는 비는 치명적이다.
8월 이후 늦장마가 이어진 올해는 '추석 사과'라고 불리는 조생종 홍로가 된서리를 맞았다.
안동시 녹전면에서 사과농사를 짓는 최정규(56)씨는 "탄저병이 순식간에 번지는 바람에 추석에 맞춰 출하하려던 사과의 절반가량을 썩혀버렸다"며 "다음 달 수확할 예정인 후지 사과밭에도 이미 탄저병 균이 침투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충북 충주와 보은 등지의 사과밭에는 사과 알이 쩍쩍 갈라지는 열과까지 생기고 있다.
열과는 수확기 사과 껍질이 얇아진 상태에서 뿌리를 통해 수분이 과다하게 흡수되면 생긴다. 알 굵고 당도 높은 사과일수록 피해가 심해 농민들의 애간장을 태운다.
배는 비교적 작황이 양호하지만, 가격이 곤두박질치고 있어 문제다. 늦은 추석으로 인해 '원황'·'화산' 등 조생종과 더불어 신고배까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지역에서 잎과 열매 등이 불에 그을린 것처럼 타들어 가는 화상병과 흑성병 등이 발생했지만, 심하지는 않은 상황이다.
조종호 나주시 농업기술센터 배 유통팀장은 "다른 지역보다 1주일 일찍 출하되는 나주 배는 추석 선물로 인기 높은데, 올해는 전국 각지에서 한꺼번에 배가 출하되면서 가격이 하락하고 있다"며 "작년 추석 평균 2만3천800원(7.5㎏)에 이르던 도매가격이 올해는 10%가량 떨어진 상태"라고 말했다.
◇ 엎친 데 덮친 '우박 폭탄'…2천㏊ 농경지 쑥대밭
지난 19일 경북과 강원 충북 북부지역에 쏟아진 손톱만 한 우박도 가뜩이나 우울한 농심을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우박이 쏟아진 시간은 5∼6분에 불과했지만, 추석 대목을 기다리던 사과·배가 폭탄을 맞은 듯이 으깨지거나 땅에 떨어졌고, 벼와 배추 등도 고개가 꺾이고 잎이 찢겨 못쓰게 됐다.
안동시 풍산읍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손병규(56)씨는 "지름 3㎝의 우박이 쏟아지면서 1만평이 넘는 사과가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변했다"며 "작년 20㎏들이 5천상자를 수확한 곳인데, 올해는 수확한 사과 전부를 주스 가공공장으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라고 탄식했다.
정상적으로 출하하면 1상자에 3만5천원 가량 받을 수 있는 사과지만, 주스 공장에는 5분의 1인 7천원 정도에 넘겨진다.
춘천시 신북읍과 동면 일대 배추밭도 초토화됐다. 배춧잎은 구멍이 숭숭 나고 갈기갈기 찢겨 형태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신북읍에서 3만㎡의 배추농사를 짓는 김명숙(63·여)씨는 "여름 배추는 늦장마에 녹아내려 못쓰게 됐는데, 이번엔 우박 때문에 농사를 접어야 한 판"이라고 울상지었다.
이번 우박으로 피해 본 농경지는 전국적으로 2천㏊에 육박한다.
사과 밭이 많은 경북이 1천159㏊로 가장 많고, 강원도 665㏊, 충북 68㏊ 등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본부 박미성 팀장은 "올해 사과 생산량을 전년보다 4% 적은 55만4천t, 배는 1% 줄어든 23만5천t으로 예상했으나, 우박 피해가 심각한 만큼 하향 조정이 불가피하다"며 "다만 과일 공급이 추석에 집중돼 명절 가격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연구원은 전반적으로 사과 배 생산이 줄지만, 추석 출하량은 전년보다 4%와 23%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황봉규 이강일 손상원 한종구 박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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