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시론] 인도적 지원 결정에 정치상황은 고려 말아야
(서울=연합뉴스) 정부가 유엔 산하 국제기구인 유니세프와 세계식량계획(WFP)의 요청을 받아 북한의 모자보건 사업에 800만 달러를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14일 밝혔다. WFP의 아동·임산부 대상 영양강화 사업에 450만 달러, 유니세프의 아동·임산부 대상 백신과 필수의약품, 영양실조 치료제 사업에 350만 달러를 각각 지원하는 내용이다. 지원 여부는 21일 교류협력추진협의회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 당국자는 "구체적인 지원 내역 및 추진 시기 등은 남북관계 상황 등 제반 여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적십자사연맹(IFRC)도 다음 달 초 덴마크에서 연례회의를 열어 보건과 식수위생 등 분야의 대북 지원 방안을 협의할 예정으로 전해졌다. 600만 달러가 책정된 IFRC 사업에는 한국과 중국, 호주, 독일, 영국 등 15개국이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
유엔 등 국제기구를 통한 대북 인도적 지원은 보수적인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도 '정치 상황과 관계없이 지속한다'는 원칙에 따라 꾸준히 지속돼 왔다. 그러나 지난해 1월 북한이 4차 핵실험을 감행하자 '지원 규모와 시기 등은 종합적으로 고려해 검토해 나간다'는 단서를 달아 전격 중단을 했다. 2015년 12월 유엔인구기금(UNFPA)의 '사회경제인구 및 건강조사 사업'에 80만 달러를 지원한 게 마지막이었다. 이번에 지원이 결정된다면, 21개월 만에 재개되는 셈이며 문재인 정부에서는 처음이다. 지원 방안이 교류협력추진협의회 의제에 올랐다는 것은 이미 관계부처 간 공감대가 이뤄졌다는 뜻이어서 이변이 없으면 그대로 의결될 공산이 크다.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북한의 도발에는 제재와 압박으로 대응하되 "우리 정부는 취약계층에 대한 대북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상황과는 무관하게 추진해 나간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대북 인도적 지원 검토 발표가 나오자 대내외적으로 논란이 뜨겁다. 논란의 핵심은 지난 3일 북한의 6차 핵실험에 맞서 국제사회가 유엔 안보리의 새 대북제재결의 등을 통해 대북 압박에 총력을 기울이는 마당에 한국 정부가 '김'을 빼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비록 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적 지원이라고 하더라도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게 반대론자들의 주장이다. 우리 정부가 미국과 일본에 사전에 설명했다고 밝혔지만, 적극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한 듯하다. 그런 분위기는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의 공개적인 비판 발언에서 드러난다. 그는 "지금은 국제사회 전체가 북한에 최대한 압력을 가할 때"라면서 "북한에 대한 압력을 훼손하는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국내에서는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인도적 지원 원칙에 동의한다"면서도 맨 먼저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안 대표는 "과연 시기가 지금인가에 의문이 있다. 북한의 핵실험 직후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큰 피해 당사국인데 이걸 해야 하는가 따져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같은 당 박지원 전대표는 "꼭 실현되어 남북관계 개선의 물꼬를 트는 노력의 일환이길 바란다"고 환영했다.
정부 내에도 '아무리 인도적 지원이라지만 정치 상황을 무시할 수 없다'는 기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이런 인식은 논리적 모순이다. '인도적 지원'(Humanitarian Aid)이란 개념은 천재(天災)나 인재(人災)로 고통받는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그 자체로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고려를 배제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정치 상황을 고려해 지원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지원'이지 '인도적 지원'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적 지원은 그 대상이 누구든,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가 '측은지심을 지닌 존엄한 인간'임을 증명하는 행위라는 측면에서 바라봐야지, 북한 주민이 동족이어서 지원한다든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건 적절치 않다. 북한 주민이든 그 누구든 필요하다고 판단되고 재정적 여력이 있으면 해야 할 일이다. 시점을 포함해 정부의 신중하고도 당당한 결정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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