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이 빚어낸 고상하고 기품 넘친 베토벤 '황제'
롯데콘서트홀 개관 1주년 기념 콘서트 리뷰
(서울=연합뉴스) 최은규 객원기자 = 이처럼 고상하고 기품 있는 '황제'가 있는가!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로 드러난 베토벤의 '황제'는 결코 권위적이거나 독재적인 '절대군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을 일깨워주려는 고귀한 성품의 '계몽군주'를 닮았으며, 이는 작곡가 베토벤이 이상적으로 생각해왔던 군주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난 18일 롯데콘서트홀 개관 1주년 기념콘서트에서 정명훈이 이끄는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의 협연자로 나선 조성진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에 대한 선입견을 뒤엎는 매우 고상한 연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협주곡의 부제인 '황제'는 이 곡의 초연 당시 한 프랑스 장교가 "이것은 황제다!"라고 외쳤다는 데서 유래한다는데, 만일 빈 초연 무대의 협연자가 조성진이었다면 그 프랑스 장교는 "이것은 여제다!"라고 외쳤을지도 모른다. 조성진은 이 협주곡의 부드럽고 우아한 특성을 매우 잘 부각했기 때문이다.
이번 무대에서 조성진의 '황제' 연주는 확실히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에선 많이 벗어나 있었지만, 오히려 작곡가의 의도를 더욱 잘 살려낸 연주였다. 이 협주곡의 악보를 보면 의외로 '부드럽게'(dolce)라는 표현 지시어를 매우 자주 발견할 수 있으며 '가볍게'(leggieramente)나 '노래하듯이'(cantabile)라는 지시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악보에 나타난 이런 지시어들만 보아도 베토벤이 이 협주곡에서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는 '황제'의 이미지를 음악적으로 구현해내려 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아마도 작곡가 베토벤이 이 시대에 부활한다면 악보에 나타난 지시에 충실한 조성진의 연주야말로 그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의 모범적인 연주라고 평했을 것 같다.
조성진은 이번 공연에서 단지 협연자가 아닌 뛰어난 '실내악 연주자'로서의 면모까지 보여주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개 협주곡이란 유형의 음악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협연자만 부각되고 오케스트라는 반주 역할에 머무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베토벤의 협주곡처럼 작품의 구조가 탄탄하고 오케스트라와 협연자의 긴밀한 앙상블이 요구되는 곡에선 협연자의 섬세한 실내악적 감각도 요구된다. 조성진과 호흡을 맞춘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는 프로젝트 성격으로 일시적으로 결성된 오케스트라인 만큼 세부적인 앙상블에 있어 다소 아쉬운 점은 많았지만, 조성진은 간혹 합주의 균형이 흐트러질 것 같은 위기 상황에서도 실내악 연주자로서의 감각을 발휘해 오케스트라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리드해갔다. 때때로 그는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는 '독주자'라기보다는 오케스트라에 맞춰주는 '반주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는 자기 자신만을 앞세우지 않고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생각하는 훌륭한 음악인의 모습이다.
음악회 후반부에는 정명훈이 지휘하는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운명'을 연주했다. 정명훈은 옛 거장 카라얀이나 번스타인처럼 이 교향곡의 목관 편성을 2배로 늘린 4관 편성으로 웅장한 사운드를 추구했고 이는 1악장과 4악장에서 힘을 발휘했다. 1악장 도입부를 여는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매우 강력했고 정명훈이 재임하던 시절의 서울시향이 들려준 굵고 풍성한 음색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연주가 진행될수록 프로젝트 성 악단의 한계는 여기저기서 드러났다. 특히 세심한 앙상블과 정확한 리듬 표현이 요구되는 제2악장에서 리듬은 부정확했고 각 변주 별로 개성이 명확하지 않아 다소 지루한 감이 있었다. 또 '어둠에서 광명이 찾아온다'고 일컬어지는 3악장 말미에서 4악장으로 이어지는 핵심 부분에서조차 음악적인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는 뛰어난 기량의 음악가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인 만큼 트럼펫과 팀파니의 화려한 연주, 플루트 수석의 솔로 등 인상적인 부분은 많았으나 오케스트라의 성부별 밸런스가 잘 맞지 않아서 베토벤 음악 특유의 강한 활력과 응집력 있는 사운드를 전하기에는 다소 부족했다. 단지 뛰어난 기량의 음악가들을 모아놓는다고 해서 좋은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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