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요람에서 무덤까지 같이했던 한지
천 년을 견디는 韓紙의 보고 '전주한지박물관'
(전주=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견오백 지천년'(絹五百 紙千年)
비단은 500년을 가고, 종이는 1천 년을 간다는 말로 한지의 내구성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한지 제조과정에서 잿물로 닥나무를 삶아 종이의 성질이 약알칼리성을 띠고, 황촉규(닥풀)를 사용해 종이의 강도를 높여 천 년의 시간을 버틸 수 있다.
1966년 불국사 석가탑 보수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ㆍ국보 제126호)은 한지의 뛰어난 보존성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석가탑을 창건할 당시인 서기 751년 통일신라 시대에 넣은 것으로, 탑 속 사리함에서 1천300여 년의 세월을 견뎌낸 것이다. 8세기에 만들어진 인쇄본이 좀먹기는커녕 그 형체가 오롯이 보존돼 있었다. 천 년을 가는 한지의 질긴 생명력에 그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뛰어난 보존성 때문에 세계적 문화재 보존용 종이로 주목받고 있다. 2004년 미국 문화재보존학회(AIC)에서 국립문서보관서(NARA) 문서보존처리 전문가에게 품질을 인정받았고, 아프리카 튀니지 국립도서관의 고문서 복원에도 한지가 활용됐다. 최근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은 1951년부터 소장 중인 문화재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앙 2세 책상' 복원에 전주 한지를 사용했다. 이 책상의 손상을 피하기 위해 중앙 서랍의 자물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거북이 등껍질의 내피 부분에 한지가 활용됐다.
◇ 세계에서 가장 질기고 오래가는 한지
일명 '닥종이'로 불리는 우리의 전통 한지는 오랜 세월 '요람에서 무덤까지' 같이했다. 우리 선조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한지로 금줄을 쳤다. 돌상에 한지를 올려놓고 미래를 점쳤으며, 아이가 성장하면 한지로 제기ㆍ연 등을 만들어 주었다. 창호지ㆍ장판지ㆍ벽지를 바른 집에서 살았으며, 서책은 물론 생활용품을 한지로 만들어 사용했다. 혼례를 올릴 때면 한지에 정성을 다한 청혼서와 사주단자를 보냈다. 생을 다하면 죽은 사람의 몸을 한지로 감싸고 지전(紙錢)을 저승길 노잣돈으로 삼았다. 제사를 지낼 때는 한지에 지방과 축문을 지어 올렸다.
전주 한지는 고려 중기 이후 조선 후기까지 수백 년간 왕실 진상품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조선 초 전주의 조지소(造紙所)에서 생산된 전주 한지는 명나라와 청나라에 보내는 공물로 쓰일 정도로 명품 중에서도 명품으로 꼽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전주에서 나라에 공급하는 종이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 닥나무를 구하기 어려워 백성들이 힘들어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 조선 시대 통치의 기준이 된 경국대전에 등재된 지방의 지장(紙匠) 분포를 보면, 전주와 남원이 각각 23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일제강점기 때 발행된 '전라북도의 특산물'이란 책은 "전북 조선지는 닥나무를 원료로 하여 지질이 강하고 정교하며, 그 명성이 전 조선에 떨치고 있다. 종이 종류에는 대장지, 대롱지, 창호지, 분백지, 견양지, 공물지, 온돌지 등 7종이 있다"고 했다.
신성림 전주한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중국의 채륜이 종이를 발명했지만, 우리의 제지술이 중국보다 뛰어나다"며 "전주가 대표적인 한지 생산지로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물이 좋고 닥나무의 품질이 우수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지와 중국의 선지(宣紙)는 모두 닥나무 껍질로 만들지만 한지는 질기고 자연스러운 반면 선지는 섬유와 볏짚 등을 섞어 만들어 거칠고 약하다.
한지는 건축 양식과 주거 환경이 바뀌면서 값싼 수입 종이에 밀려나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 전주페이퍼는 한지의 다양한 모습과 우수성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2007년부터 국내 첫 종이박물관(1997년 개관)의 명칭을 전주한지박물관으로 변경했다. 2011년 리모델링 공사 후 재개관해 매년 6만여 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다.
◇ 중국인들이 최고급 종이로 친 高麗紙
전주한지박물관은 상설전시관(한지역사관, 한지미래관)과 기획전시실, 한지생활관, 한지재현관으로 구성돼 있다. 1층 안내데스크를 지나 계단을 따라 오르면 단아하면서 모던한 느낌을 살려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한지아트월과 영원함·무한함을 상징하는 원 구조물에 흑피와 백피를 감싸 은은한 조명을 비추는 상징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2층에 올라 오른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한지역사관이다. 이곳에서는 종이 이전의 기록 매체, 종이의 발명과 전래, 한지의 역사와 제작 과정, 다양한 한지의 종류 등을 소장 유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인류, 기록을 시작하다' 코너에는 중국의 갑골, 인도의 패엽,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 이집트의 파피루스, 지중해의 양피지, 나주 다시면 복암리 고분군 출토 목간 등 종이 이전의 기록 매체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돼 있다. 서양에서 종이(paper)라는 말의 어원이 된 파피루스는 글자를 쓰기 어렵고 쉽게 부서지는 단점이 있다. 종이에 가장 가까운 기록 매체였던 양피지는 100쪽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10마리의 양이 필요했다고 한다.
'한지, 세월을 담다. 한지의 역사와 흔적' 코너는 '삼국시대 한지의 태동기' '통일신라 시대 한지의 토착기' '고려 시대 한지의 발전기' '조선 시대 제지술의 완성기' '근·현대의 한지의 쇠퇴, 그리고 부활' 등 한지 역사를 살필 수 있는 공간으로 이뤄져 있다. 닥나무를 주원료로 하여 종이를 만든 것은 7세기 전후다. 이때부터 중국식 제지술에서 벗어나 우리식 제지술로 종이를 생산했고, 고구려 승려 담징이 610년 일본에 종이 만드는 법을 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고려 시대 중국인들은최고급 종이를 '고려지'(高麗紙)라 했고, 조선 시대에는 중앙에 조지서(造紙署)를 설치해 양질의 종이를 생산했다.
일제강점기와 서양의 양지 유입으로 한지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최근에 이르러 한지의 친환경성, 기능성 등이 주목받으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상품 한스타일 6개 분야 중 하나로 선정되는 등 부활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장인들이 한 장 한 장 손으로 떠낸 한지에 그대로 본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불조직지심체요절' '세종실록지리지' 복본(複本)이 이채롭다.
◇ 아흔아홉 번 손질 후 한 번 더 만져야 완성
닥종이 인형으로 만든 '한지제작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한지는 닥나무 거두기→찌기→껍질 벗기기→흑피 제거작업→삶기→티 고르기→두드리기→종이 뜨기→물빼기→말리기→ 다듬기(도침) 과정을 거친다. 신성림 학예연구사는 "한지는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고, 뜨는 등 아흔아홉 번 손질을 거친 후 마지막 사람이 한 번 더 만져야 완성된다고 하여 백지(百紙)라고도 불렀다"고 귀띔한다. 특히 여러 장의 종이를 놓고 다듬이나 디딜방아 등으로 두들기는 도침(搗砧)은 우리만의 독특한 종이 표면 가공기술로 이 과정을 거치면 표면이 치밀해지고 기름종이처럼 매끈한 종이가 된다고 설명한다.
실물과 도표, 영상이 적절히 배치돼 발걸음을 옮기면서 '외발뜨기와 쌍발뜨기 비교' 등을 통해 한지에 대한 지식을 자연스레 습득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작성된 간찰(簡札)과 교서(敎書), 합죽선(合竹扇), 옷이나 물건을 보관하던 이층농, 바느질에 필요한 색실을 보관하던 실첩, 소품이나 음식들을 보관하던 동고리, 한지로 만든 장신구, 한지를 꼬아 만든 지승가방 등이 전시돼 한지의 다양한 쓰임새를 보면서 미(美)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 홍춘수 등 한지 장인들을 소개하는 복도를 지나면 한지미래관이다. 한지는 생활용품에서부터 현대 공예작품, 음향기 재료·항균 용지·필터지 등 첨단산업 분야까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한지의 여러 쓰임새를 보고 나면 정보검색기를 이용해 전주 한지에 대해 더 알아볼 수 있다. 스크린 터치로 '나도 한지 박사 OX' 문제를 풀어보면 흥미가 배가된다. '손으로 느끼는 한지' 코너에서는 순지(순수한 닥나무를 사용해 만든 고유의 한지), 색지, 창호지, 백지, 인쇄용 한지, 장판지 등을 직접 만져보고 느껴볼 수 있다. 다양한 테마전시가 열리는 기획전시실과 생활 속의 한지 제품들이 전시된 한지생활관을 둘러보고 1층으로 내려가면 한지재현관으로 이어진다. 이곳에서는 한지 제작 과정을 재현한 모습을 살펴보고 무료로 한지 뜨기 체험을 해볼 수 있다.
▲관람 시간 = 화~일요일, 09:00~17:00(휴관 매주 월요일, 1월 1일·설·추석)
▲관람 요금 = 무료 문의 ☎ 063-210-8103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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