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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역사 2cm] 고려 문신들의 '갑질'…장군 수염 태우고 뺨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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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역사 2cm] 고려 문신들의 '갑질'…장군 수염 태우고 뺨 때렸다

(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박찬주 육군 대장 부부의 공관병 갑질 여파가 모든 정부 부처로 확산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7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전 부처 차원에서 갑질 문화를 점검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갑질 관행은 군에만 한정된 게 아니어서 실태 점검을 계기로 공직사회에 적잖은 파문이 생길 것으로 예상한다.

국방부 조사로는 박 대장 부부의 갑질 의혹이 대부분 사실이었다.





공관병에게 손목시계형 호출 벨을 채우고 뜨거운 떡을 손으로 떼도록 했으며 골프공 줍기나 텃밭농사 등을 시킨 게 확인된 것이다.

갑질은 경찰이나 재외공관 등에서도 빈발했으나 문제가 생길 때마다 땜질식 처방으로 끝났다.

강자의 횡포는 민간사회에서 더 심한지도 모른다.

갑질은 계급사회가 형성된 이래 늘 존재했다.

관존민비 사상이 엄격했던 조선 시대에는 신분구조의 정점인 양반의 행패가 심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1737~1805년)이 쓴 소설 '양반전'은 귀족들의 갑질 실태를 잘 보여준다.

과거에 합격하면 온갖 재물을 챙기고 노비는 물론 양민까지 맘대로 부려 먹는다.

이웃집 소를 제 것처럼 사용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자기 집 농사일도 시킨다.

양반의 계집종 겁탈은 비일비재했다.

지배층 내부에서도 갑을관계가 형성된다.





고려 시대에는 무인들이 문반 출신 관리들에게 온갖 멸시와 수모를 당했다.

고려 중기 무신정변이 발생한 데는 차별 대우와 갑질 영향이 컸다.

무신정변은 정중부 등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의종을 폐위시키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무신 반란이 일어난 것은 1170년이다.

그해 8월 어느 날 참사를 예고하는 일이 터진다.

의종이 나들잇길에 제안한 수박 경기에서다. 수박은 한반도 등에서 전래한 맨손 격투기다.

경기가 한창 진행될 때 돌발 사태가 발생한다.

힘에 밀려 뒷걸음치던 고령의 대장군 이소응을 향해 젊은 한뢰가 뛰어나가 뺨을 때린 것이다. 대장군은 종3품 벼슬로 군부 서열 두 번째 직책이다.

한뢰는 온갖 모욕적인 언동을 하며 발길질까지 한다.

한뢰가 화가 난 것은 수박 경기 전에 의종을 태운 수레가 수렁에 빠졌을 때 무신들과 벌인 언쟁 때문이다.

자기보다 품계가 높은 무신들에게 왕의 행차가 늦어졌다고 호통치면서 옥신각신했다.

한뢰의 오만함은 문신들의 우월의식에서 비롯됐다.

이소응이 봉변을 당하자 상장군(중앙군 최고 사령관) 정중부가 나서 한뢰의 멱살을 잡는다.

이소응이 나이도 많고 품계도 높은데 감히 주먹질했느냐는 질책도 한다.

이 과정을 줄곧 지켜보던 의종이 사태를 악화시킨다.

한뢰를 꾸짖기는커녕 되레 정중부를 야단친 것이다.

정중부도 왕실 경호실장 시절에 김부식 부자한테서 심한 모욕을 당한 적이 있다.

궁중연회에서 돌풍으로 불이 꺼지자 정3품 문신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버렸다.

이때 정중부가 김돈중을 두들겨 팼다가 처벌을 받는다.

당대 최고 권력자 김부식의 아들을 건드렸다는 이유에서다.

무신들의 분노는 의종 일행이 놀이터인 보현원으로 이동했을 때 폭발한다.

이날 수박 경기에서 군인들을 조롱했던 문신들을 남김없이 죽여버린다.

뺨을 때리며 기고만장했던 한뢰는 의종의 의자 밑에 숨었다가 발각돼 현장에서 살해된다.

수염을 태운 김돈중도 목숨을 잃는다. 산으로 도망쳤으나 노비의 밀고로 동생 김돈시와 함께 붙잡혀 죽는다. 이들의 목과 사지는 잘려나가 저잣거리에 내걸린다.

김돈중의 아버지 김부식 묘지는 파헤쳐져 부관참시를 당한다.

문신의 갑질로 켜켜이 쌓인 적개심이 핏빛으로 분출한 것이다.

의종은 태자와 함께 쫓겨나고 어린 손자는 살해된다.

원한이 얼마나 크게 사무쳤는지 학살에 그치지 않고 문관들의 집까지 부숴버린다.






조선 연산군 시절인 1498년 김일손 등 신진 사림파를 죽인 무오사화의 이면에는 유자광의 분노가 있었다.

신분 제약이 큰 서얼 출신인데도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등 5명의 임금 밑에서 승승장구한 인물이다.

권력 핵심부 진입은 그냥 이뤄진 것은 아니다. 숱한 모멸감을 참느라 엄청난 마음고생을 했다.

유자광의 누적된 분노는 연산군 시절인 1498년 영남 사림파 학살로 나타난다.

조정 대소사나 임금 행적 등을 기록하는 사관 김일손의 사초를 트집 잡아 피바람을 일으킨다.

사관이 적는 사초는 임금 사망 후 실록 편찬에 활용된다.

조카 단종을 죽이고 집권한 세조에게 불리한 내용이 문제의 사초에 담겼다.

사육신이 절개를 지켰고 세조가 장남의 후궁을 겁탈하려 했다는 기록이다.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 제문도 당시에 공개된다.

세조를 중국 초나라 왕 의제를 죽인 항우에 비유해서 왕위 찬탈을 은근히 비난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유자광은 조의 제문을 문제 삼아 오래전에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한다.

부관참시는 복수극 성격이 짙다.

경상도 관찰사(도지사) 유자광은 하급자인 경남 함양 군수 김종직으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한다.

김종직이 신라 시대 누각인 함양 학사루에 걸린 현판을 떼 소각하도록 했다.

소인배 유자광이 함양 대관림 절경에 감탄해 지은 시로 현판 글을 만들었다는 이유에서다.

김종직이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할 때도 유자광은 치욕을 겪는다.

송별연에 들렀다가 김종직의 막내 제자로부터 심한 조롱을 당한 것이다.

유자광은 분을 삭이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무오사화로 응징한다.

김일손을 비롯한 영남학파 핵심들을 죽이거나 노비로 삼았다.

조선 말 전국 서원이 대거 사라진 원인 중 하나는 만동묘 묘지기의 갑질이었다.

서원이란 선비들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 성리학을 소개한 안향 사당을 짓고 백운동서원이라 한 것이 시초다.

이후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조선 말에는 700여 곳으로 늘어나 폐단이 많았다.







중앙 정치인들과 연계돼 당파싸움을 일삼고 농민 땅을 빼앗거나 세금을 걷는 등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아들 고종을 대신해 권력을 잡자마자 서원 혁파에 나선다. 중요 서원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했다.

노론이 가장 신성시한 충북 괴산의 만동묘도 이때 없어진다.

창덕궁 후원 대보단과 기능이 겹친다는 게 표면 이유였으나 이하응의 원한이 진짜 이유다.

대보단은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 황제 신종의 은혜를 갚는다는 취지로 만든 제단이다.

조선 왕들은 문무백관과 함께 아홉 계단 위에 있는 대보단을 향해 정례적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만동묘도 명나라 신종을 기리기 위해 1704년 지은 사당이다.

묘지기는 미천한 신분이었는데도 중국 황제 묘를 관리한다는 이유로 안하무인이었다.

'임금 위에 만동묘 묘지기'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이하응도 집권 전 만동묘에 들렀다가 봉변을 당한다.

가파른 계단을 느릿느릿 걸어 오를 때 묘지기가 달려들어 발로 걷어찼다.

명나라 황제를 모신 신성한 곳에서 하인의 부축을 받아 결례했다는 이유에서다.

묘지기의 발길질에 이하응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이하응은 어처구니없는 일에 화가 치솟았으나 와신상담한다.

그러다가 집권했을 때 '적폐청산 1호'로 만동묘 철폐를 지시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최후 순간까지 함께한 차지철은 갑질 탓에 명을 앞당겼다.







어릴 때는 온순하고 내성적이었으나 박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맡으면서 오만방자했다.

장관들을 부하처럼 다루고 국무총리조차 얕봤다.

청와대 회의 때는 비서실장을 제치고 대통령 다음 자리를 차지했다.

사설 정보기관까지 거느리면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사사건건 충돌하기도 했다.

김재규는 경호실장의 잦은 월권에 심한 불쾌감을 느끼다가 1979년 12월 12일 궁정동 안가에서 박 전 대통령과 차지철에게 권총을 발사한다.

위세 등등하던 차지철은 막상 위기 때는 박 전 대통령을 남겨두고 혼자 화장실로 도망갔다가 최후를 맞았다.

우리 역사에 기록된 대형 갑질 당사자는 대부분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도 아무런 교훈을 받지 못한 듯 갑질 악습은 현대 사회까지 멍들게 한다.

헌법은 인간 존엄성과 행복추구권, 기본적 인권 보장, 국민 평등, 특수계급 부인 등을 규정하는데도 막상 현실은 갑질투성이다.

소득 불평등과 고용 불안정 등이 심해진 탓에 사회 곳곳에서 악성 갑을관계가 형성됐다.

갑질 고리를 끊으려면 가해자 응징과 별도로 약자를 배려하는 다양한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다만, 갑질 개선에도 옥석 구분과 과유불급 원칙이 적용된다.

정상적인 상하관계나 권리책임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을 갑질로 둔갑시켜 공격한다면 우리 사회의 근간이 위태로워진다.

약자들이 집단의 힘에 기대어 권리만 내세우고 상응하는 책임을 회피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지면 일탈과 오만을 부추길 우려도 있다.

hadi@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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