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역사 2cm] '독립운동 산실' 임청각은 본가·처가·사돈 모두 항일투쟁
(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이낙연 국무총리가 여름 휴가를 '영남 3대 양반촌'에서 보내면서 오는 10일 안동 임청각(보물 182호)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한다.
1519년에 지어진 임청각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년)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한 고성 이씨 종택이다.
영남산 기슭의 임청각은 99칸까지 증축됐으나 일제강점기에 행랑채와 부속건물 등 50여 칸이 뜯겨나갔다.
독립운동 성지인 임청각의 정기를 끊으려고 마당으로 중앙선 철길을 냈기 때문이다.
이 총리의 임청각 방문은 여름 휴가를 안동에서 보낸다는 말을 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추천해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임청각을 찾아 "안동이나 유교라고 하면 보수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는데, 안동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했다"고 말했다.
임청각은 현존하는 조선 시대 살림집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지만, 그것보다 더 유명한 것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낳았다는 점이다.
임청각 종손으로 태어난 석주 선생을 비롯해 두 동생 이상동·이봉희, 외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 조카 이형국·이운형·이광민, 당숙 이승화 등 9명이 독립유공자다.
을미 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투쟁을 이끈 외삼촌 권세연(1836~1899년)까지 합치면 10명이다.
석주가 항일투쟁에 온 몸을 던진 것은 일제의 국권 강탈 이듬해인 1911년부터다.
그해 가족과 친지, 동지 등 50여 가구와 함께 중국 동북부 간도로 옮겨가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나선다.
국내에서 의병투쟁과 애국계몽활동을 해봤으나 그 방식으로는 일제를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망명 직전에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며 광복투쟁 매진을 다짐한다.
집 뒤쪽 사당으로 올라가서는 망명 사유를 아뢴 다음 신주와 조상 위패를 땅에 묻었다. 독립되기 전에는 절대 귀국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다.
지린 성 유화현에 정착한 석주는 한인 자치기구인 경학사 사장을 맡아 동포들의 생활 터전 마련과 법적 지위 보장 등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기름진 땅에 물을 대고 벼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새로운 농법도 보급한다.
화전으로 간신히 생계를 꾸리던 조선인들은 간도 사상 처음으로 벼농사에 성공하자 배고픔에서 벗어난다.
선생은 틈나는 대로 한국 고대사도 가르친다.
만주는 고구려 패망 이후 되찾지 못한 우리 영토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석주는 동지들과 함께 창설한 경학사 부속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로 키운다.
여기에서 배출된 청년들은 훗날 항일전투에서 맹활약한다.
1925년 상해임시정부 지도체제가 대통령 중심에서 내각책임제로 바뀔 때 초대 국무령으로 선출된다.
선생의 화급한 임무는 임시정부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계열의 대립으로 내분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독립 방안으로 제시된 외교론, 준비론, 실력양성론 등을 물리치고 무장투쟁 역량을 높이는 것도 중요 과제였다.
광복투쟁이 일제 무력에 맞선 전쟁인 만큼 군사력의 뒷받침이 없으면 공허하다고 석주는 판단했기 때문이다.
임정 개혁의 하나로 항일운동 최전선에서 활동하던 김동삼, 오동진, 김좌진 등을 국무위원으로 내정한다.
임정을 항일무장투쟁 지도 기구로 바꾸려는 취지에서다.
하지만 당사자들이 입각을 거부한 데다 임정 내분이 격화한 탓에 개혁 노력은 별 성과를 내지 못한다.
이런 현실에 실망한 석주는 국무령에서 물러나 서간도로 돌아간다.
서간도에서 독립단체 통합 노력에 주력했으나 1932년 최악의 상황을 맞는다.
중국 동북부를 침공한 일제가 만주국을 세운 탓에 독립운동이 힘들어진 것이다.
독립 희망이 꺽여 낙담한 탓인지 석주는 그해 5월 병을 얻어 생을 마감한다.
광복을 열망하는 강력한 의지는 유언으로 남겼다.
"조선 해방 전에는 나를 데려갈 생각을 하지 마라. 독립되면 유골을 싸서 조상 발치에 묻어 달라.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
석주 본가뿐 아니라 처가에서도 수많은 독립투사가 등장한다.
선생의 부인 김우락(1854~1933년) 여사의 친정인 안동시 임하면 내앞마을에서는 독립유공자 25명이 나온다.
의섬 김씨 집성촌인 이 마을은 1910년 12월 한순간에 텅텅 비게 된다.
국권 회복을 위해 대한민국 최초로 문중 단위 망명을 했기 때문이다.
백하 김대락(1845~1914년) 선생을 비롯한 주민 약 1천 명이 엄동설한에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백하의 매제인 석주 일행보다 1개월가량 앞선 시점이다.
만삭인 손부와 손녀도 망명대열에 합류한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아이가 일제 신민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백하의 막내인 김락 여사는 단식 순국한 향산 이만도(1842~1910년) 선생의 며느리다.
여사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극심한 고문 끝에 두 눈을 실명한다.
만주벌 호랑이로 유명한 일송 김동삼 선생도 내앞마을 출신이다. 백하의 조카뻘 친족이다.
임정 산하 군사기구인 서로군정서 참모장을 지낸 일송은 일제에 체포돼 옥살이하다가 순국한다.
석주 선생의 매부 박경종 선생도 신흥강습소 설치 등을 도운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다.
이회영·이상룡 집안과 함께 독립운동 3대 명문가로 꼽히는 왕산 허위(1854~1908년)는 석주와 겹사돈 관계다.
왕산은 1908년 사형을 당할 정도로 일찌감치 항일전선에 뛰어든 독립운동 선구자다.
친형 허겸과 4촌 허필, 후손 등은 만주와 러시아 등지에서 광복투쟁에 헌신한다.
왕산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부터 의병활동을 했다.
고종의 의병 해산령으로 잠깐 무기를 내려놓고 벼슬도 한다.
1904년에는 오늘날 대법원장 대행 격인 평리원 서리재판장에 올라 출세가도를 달리는 듯 했다.
하지만 일제 침략이 가속하자 일본을 규탄하고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만들어 살포한다.
고관대작들이 일제 만행에 협조하거나 침묵할 때 왕산은 공직을 포기한 채 외로운 항일투쟁에 다시 나선다.
의병대장으로서 한양 진공작전을 시도하고 경기도 일대에서는 대대적인 항일 유격전을 벌인다.
이때 매국노 이완용이 경남 관찰사(도지사)와 내부대신(행안부장관) 자리를 제시하며 투항을 권고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외교권 회복, 통감부 철거 등 30개 조건이 관철되지 않으면 결사 항전하겠다는 의지도 전달한다.
신출귀몰하던 왕산은 1908년 일제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서대문 감옥 설립 이후 첫 사형 집행이다.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는 그의 호를 따 지은 이름이다.
왕산의 조카인 허형식은 1930~1940년대 북만주에서 항일유격대로 명성을 날린다.
중국 공산당 주도로 결성된 한·중 통합 군사조직인 동북 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으로 활동했다.
북한을 건국한 김일성, 김책, 최현, 최용건 등도 동북 항일연군 출신이다.
허형식은 1942년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전사한다.
이육사(1904~1944)의 시 광야에 나오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허형식으로 추정된다.
석주와 왕산 가문은 서간도에서 혼맥을 형성한다.
석주 손녀 이후석 여사와 왕산 아들 허국 선생이 결혼했다.
석주 손자 이병화 선생은 왕산 사촌의 손녀 허은(1907~1997년) 여사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허은 여사의 고모인 허길은 이육사 선생의 어머니다.
육사는 항일투쟁과 문학 세계를 넘나들며 일제에 맞선 저항시인이다.
허은 여사는 1995년 출간한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항일 투사 집안에서 태어나 항일 투사 집으로 시집간 것이 다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조선 중기에는 안동 임청각의 딸이 전라도 의병장 제봉 고경명(1533~1592년) 장군의 맏며느리로 들어간다.
제봉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요직을 거쳐 1591년 경상도 동래부사를 끝으로 은퇴한다.
1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마상 격문을 지어 호남 일대에서 의병을 모아 대대적인 항전을 벌인다.
마상 격문은 당나라 최치원의 토황소격문, 촉한 제갈량의 출사표에 비견되는 명문이다.
제봉은 두 아들과 의병 6천여 명을 이끌고 충남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차남 인후와 함께 전사한다.
장남 종후는 아버지와 동생의 복수를 맹세하며 이듬해 의병 400여 명과 함께 진주성 싸움에 참전했다가 순국한다.
종후 부인이 임청각 출신으로 석주의 14대 존고모다.
시아버지와 남편, 시동생이 전쟁터로 갔을 때 자식과 시댁 식구를 데리고 친정인 안동으로 피란 왔다고 한다.
전라도 제봉 일가의 순국 정신이 사돈인 경상도 고성 이씨 문중으로 이어져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명문가가 탄생한 셈이다.
제봉 후손 6명도 광복투쟁에 뛰어들어 독립유공자 훈장을 받는다.
영호남을 대표하는 두 애국지사 집안은 지금도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임청각과 혼맥을 형성한 집안은 여러모로 닮았다.
석주 이상룡, 왕산 허위, 백하 김대락, 제봉 고경명 집안 모두 노블레스 오블리주(상류층 도덕 의무)를 실천했다.
학식이 풍부하고 재산이 많았는데도 부귀영화를 걷어차고 국난 극복의 선봉에 선 것이다.
허은 여사의 회고록은 독립투사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잘 보여준다.
여사는 시집살이 첫날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부엌에 들어가 조석을 장만하려니 장이 없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땔나무도 없었고 식량도 없었다. 간장이나 된장이 없기는 친정에서와 마찬가지였다"
석주 선생은 그 많던 논밭은 물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99칸짜리 종택까지 처분해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쓴 탓에 삶이 늘 곤궁했다.
왕산 가문도 전 재산을 광복운동에 쏟아부었다.
구미 일대 최고 부자였으나 가산을 남김없이 처분해 독립운동에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도 두 가문은 광복 이후 한참이 지나도록 세인의 기억에서 잊혔다.
왕산 후손들은 중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북한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조국의 보살핌을 거의 받지 못했다.
석주 일가도 1932년 선생이 순국한 이후 나락으로 떨어진다.
허은 여사의 자녀 7남매 중 장남 이도증은 10대 나이에 일제 경찰에 끌려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둘째, 셋째, 넷째는 실종되거나 사고 등으로 숨진다.
다섯째 증손자와 여섯째 증손녀는 초등학교 졸업 후 대구 보육원에 맡겨진다.
종손 이도증의 사망으로 임청각 종택의 대가 끊기자 조카 이창수(53.씨티은행 검사역) 씨가 양자로 들어가 종통을 잇고 있다.
허은 여사는 회고록에서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남 앞에 비굴함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래도 선대의 긍지가 그들 핏속에 자존심으로 살아 있구나 싶다"고 적었다.
친정과 시댁 모두 독립운동으로 몰락했는데도 국가가 제대로 배려해주지 않아 서운함을 느꼈다고 읽히는 대목이다.
대한민국은 식민지에서 벗어나 세계 11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는데도 독립유공자 보은 노력은 초라하다.
이낙연 총리는 임청각 방문을 계기로 석주 일가의 위국헌신 정신을 기리고 독립유공자 예우를 대폭 개선해야 한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오욕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라도 보훈정책 수정이 필요하다.
영호남 명문가가 400여 년간 우의를 다져온 전통은 동서화합의 지렛대로 활용해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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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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