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시원' 바이칼호에서 '평화의 다짐' 울려퍼지다
고려인 회상열차 탐사단 평화문화제…"슬픈 역사 되풀이 말자"
(리스트비안카<러시아>=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여든 해의 어리석음과/ 여든 해의 뉘우침을 싣고/ 둔중한 철마의 뼈마디마다 새겨진/ 그날의 통한마저 싣고 갑니다/ 너는 누구냐 너희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 우리는 누구냐"('저기, 땅끝에서 울려오는 소리'의 한 대목)
민족의 시원(始源)이라고 일컬어지는 바이칼호를 내려다보며 '극동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 회상열차'의 단원인 윤고방 시인이 80년 전 강제이주당한 고려인들의 수난을 되짚어보고 후손들의 무책임을 자책하는 헌시를 낭송했다.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지난 23일부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스탄 알마티까지 대장정을 펼치고 있는 회상열차 탐사단은 현지시간으로 28일 오후 이르쿠츠크에서 남쪽으로 70여㎞ 떨어진 바이칼호의 어촌 리스트비안카의 체르스키전망대에서 평화문화제를 개최했다.
사회를 맡은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 이창주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대 석좌교수는 "이 일대 부랴트족은 무속이나 성황당 등 우리와 유사한 풍습을 지켜오고 있어 바이칼호 유역에서 우리 민족의 뿌리가 생겨났을 것이라는 학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면서 "국제정치학자들은 유라시아의 중심인 바이칼호를 '평화의 호수'(Peace Lake)가 아닌 '평화의 바다'(Peace Sea)라고도 부르는 만큼 이곳에서 평화문화제를 여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표완수 조직위원장(시사인 발행인)은 "민족이 남북으로 나뉘어 또다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지금 고려인 선배들이 겪었던 고통과 일제에 항거한 높은 뜻을 되새기며 통일 조국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선배 영령 앞에 약속드린다"고 다짐했다.
이부영 공동대회장(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은 "바이칼호의 그윽하고 깊은 물살을 생각하며 모두 민족사의 도도한 흐름을 떠올렸을 것"이라면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우여곡절과 아픔을 세월의 흐름에 흘려보내고 민족의 밝은 미래를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자"고 권유했다.
이어 윤고방 시인이 헌시를 낭송했고 일반시민 자격으로 참여한 정숙 씨도 자작시 '울음의 밑동'을 읊었다.
"바이칼 호수에서 가장 큰 알혼섬/ 원주민 부랴트족 어르신이 뒷짐을 지고/ 마을을 지날 때면 살아생전 할아버지 모습이다/ 후지르마을 언덕에서 자란 냉이 뿌리도 씹어보았다/ 고향의 맛이다…"
일반시민 황인미 씨는 노래 '레이즈 미 업'(Rase Me Up)과 '10월의 어느 멋진 날'을 들려줬고, 고려인 연구가 김병학 씨는 러시아 콘스탄틴 시모노프의 시 '기다림'을 러시아어와 우리말로 낭송했다.
광주고려인마을에 사는 고려인 2.5세 시인 김 블라디미르 씨는 이번 여정에서 지은 '행복을 위해'를 낭송하고 정막래 계명대 교수가 통역했다.
"수많은 고통을 겪은 내 민족은 무너지지 않았노라/ 그 누구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었노라!/ 그 당시에 무얼 위해 우리를 그토록 아프게 했나/ 나는 아무리 악한 적에게라도 이렇게 행하지 않으리라…"
축도를 집전한 공동대회장 함세웅 신부는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 유적을 돌아보며 독립군끼리 죽고 죽이는 자유시 참변의 비극을 접했다"면서 "이제 다시는 동족끼리 반목하고 죽이는 슬프고 어리석은 역사를 반복하지 말도록 관용과 지혜를 지니게 해 달라"고 기원했다.
이삼열 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은 "평화라는 것은 건강, 안정, 화해, 발전 등 인간이 바라는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높은 개념"이라며 "이번 순례길에서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고 명상하자"고 당부했다.
회상열차 탐사단원들은 만세 삼창을 하고 '광야에서'와 '만남'을 합창하며 평화문화제를 마무리한 뒤 준비해온 제물을 나눠 먹었다. 이들은 이르쿠츠크역에서 다시 시베리아횡단열차에 올랐다. 30일 오후 노보스비르스크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강제이주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 첫발을 디딘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로 향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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