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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80년] ⑦ 부친 행로 좇는 김 블라디미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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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80년] ⑦ 부친 행로 좇는 김 블라디미르 씨

우즈베크 교수였다가 광주서 막노동…"같은 민족으로 대해주길"

"기차에서 80년 전 부모 신음 들어"…두 번째 시집 출간 준비



(카림스카야<러시아>=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창밖의 자작나무를 바라보며/ 부모님의 신음 소리를 듣습니다. /이 소리는 평생 마음에 남을 겁니다."

광주광역시 고려인마을에 사는 시인 김 블라디미르(62) 씨가 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 지은 시 구절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지난 2월 '광주에 내린 첫눈'을 정막래 계명대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한 김 블라디미르 씨는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기념사업회'가 주최한 '극동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회상열차' 탐사단의 일원으로 지난 24일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에 올랐다.

80년 전 조부모와 부모가 끌려갔던 길을 따라가는 그의 귀에는 열차 바퀴가 레일 위를 달리며 내는 굉음이 부모의 신음으로 들린 것이다.

25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열차에 동승한 정막래 교수는 통역을 해주며 "참 마음이 맑다고 느껴지지 않으세요? 이래서 제가 이분 시를 좋아한다니까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게 이 시를 들려주시더군요"라고 말했다.

김 블라디미르 씨의 조부(김수옥)는 일제강점기에 어린 아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에 정착했다. 아버지(김곰배)는 1934년 우수리스크의 고려인사범대를 졸업해 한국어를 가르쳤다.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갔다가 이듬해 카스피해 연안의 아스트라한으로 또다시 옮겨졌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기 전까지 고려인은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고 콜호스(집단농장)에서만 일해야 했다. 그곳에서는 한국어를 가르칠 일이 없으니 아버지도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는 1955년(출생신고는 1956년) 아스트라한 인근 농촌에서 태어난 뒤 이듬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족과 함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이곳에서 상점을 운영했다.

"어떤 책을 보니 1937년 소련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주할 때 사정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하더군요. 비록 열차 화물칸에 태우긴 했으나 난방 장치가 있어 춥지 않았고, 이주보상비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변 친구들의 말을 듣거나 영상 자료를 보면 딴판입니다. 이주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으며, 그 시체를 묻어주지도 않고 열차 밖으로 던져버렸다는 거죠. 갖고 가는 짐은 8㎏으로 제한해 그동안 일군 땅과 세간살이를 모두 두고 올 수밖에 없었고요. 이번 여행을 통해 제 눈으로 그때의 진실을 찾고 싶습니다."

김 블라디미르 씨는 우즈베키스탄 문학대를 졸업하고 모교 교수로 재직하며 러시아문학을 가르쳤다. 2011년 정년퇴임한 뒤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이주해 광주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에 정착했다.

"저는 도시에서 우즈베키스탄 사람들과 함께 자랐고 대학에서도 고려인과 어울릴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었고, 알고 싶어도 알 방법이 없었죠. 아버지께서도 고향과 관련된 일은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으시다가 1990년 돌아가시기 직전에서야 한국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나는 못 가더라도 너는 꼭 조국 땅을 밟아야 한다'고 당부하셨죠."

김 씨에 이어 딸 내외와 아들도 한국으로 들어왔다. 월세 다가구주택 1층에는 딸과 사위와 손주들이 살고 김 씨 내외가 2층을 쓴다. 인근 아파트에 사는 아들은 한국에서 고려인 여성과 결혼해 지난 4월 25일 그에게 손자를 안겨주었다. 김 씨는 주로 광주 교외의 과수원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전 펜 말고는 평생 무거운 걸 들어본 적이 없다가 모국에 와서 처음 육체노동을 했습니다. 한국말을 하지 못하니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죠. 그나마 몇 해 전 암 수술을 한 뒤로는 힘쓰는 일을 전혀 못합니다. 과수원에서 배, 감, 딸기, 블루베리 등을 가꾸고 따는 게 일과입니다."

중학교 때부터 시를 써왔다는 김 씨는 모국에 귀환한 뒤로도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을 시에 담아냈다. 고려인마을을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던 정막래 교수와 인연이 닿아 우리말로 시집을 펴냈다. '광복절', '추석', 가을앓이', '여전히 나는 데이트하러 갈 것이다', '분장을 씻어내고 가면을 벗자' 등 35편이 실렸다.

정 교수는 "지금도 틈만 나면 시를 써서 내게 보내온다"면서 "이번에 회상열차 일정이 끝나면 여행 기간에 쓴 시를 포함해 두 번째 시집을 낼 준비를 하자고 한다"고 귀띔했다.

"그전에도 국내 고려인 회보에 제 시가 실리긴 했지만 시집이 나온 건 처음입니다. 고려인마을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해주더군요. 모르는 사람들도 길에서 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넬 정도로 유명해졌죠. 고려인을 허드렛일 하는 사람으로만 여기던 이웃 사람들도 우리를 다시 보게 됐다고 합니다. 다 정 교수님 덕분이죠."

요즘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그에게 우리말로 시를 써볼 의향은 없는지 묻자 "나이가 젊으면 목표로 삼겠는데 이제는 늙어서 자신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한국 사람들에게 바라는 점을 물어보자 "주변에 좋은 친구가 많고 고마운 사람도 많다"면서도 뼈아픈 지적을 잊지 않았다.

"고려인들은 우리나라가 힘이 없을 때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빼앗긴 국권을 찾으려고 두만강을 건넌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그때 조국은 동포들에게 어디에든 살아남아 있다가 형편이 좋아지면 돌아오라고 했던 거죠. 그래서 이제 돌아왔는데 왜 우리를 외국인 취급하는 겁니까? 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우리를 같은 한민족의 일원으로 대해주기 바랍니다."

그는 태극기와 한글이 새겨진 회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나는 제가 입고, 나머지는 우즈베키스탄에서 만날 친구들에게 선물로 나눠주려고 광주에서 샀습니다."

heeyo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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