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인도 공주 허황옥이 가야에 온 까닭은
우리나라 최초 국제결혼 커플 된 수로왕…신화 속 생생한 이야기
(김해·창원·부산=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수로왕(首露王). 황금알에서 태어나 가야의 중심국인 금관가야의 초대 왕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연상의 인도 공주 허황옥과 결혼해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결혼 커플이 됐다. 얼마나 금실이 좋았던지 두 사람은 슬하에 10남 2녀를 뒀다. 수로왕과 허황옥에 얽힌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장소들을 둘러봤다.
서기 42년 3월 계욕일(음력 첫 사일(巳日)에 액을 없애기 위해 물가에서 몸을 씻고 모여 술을 마시는 날) 구지봉(龜旨峯)에서 사람들이 흙을 파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노랫말은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란 이상한 내용이었다.
돌연 하늘에서 붉은 줄에 매달려 내려온 붉은 보자기에는 황금빛 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는 황금알 여섯 개가 담겨 있었다. 12일이 지나고 그 다음 날 아침, 상자를 열자 알은 어린아이로 변해 있었다. 아이들은 10여 일이 지나자 키가 9척으로 자랐다. 이들은 용처럼 생긴 얼굴에 8가지 빛깔 눈썹과 겹으로 된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는데, 맨 먼저 세상에 나온 이를 수로(首路)라 불렀다. 나라는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耶國)이라고 했다. 나머지 다섯 명도 각각 다섯 가야의 왕이 됐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의 도입부는 이렇게 요약된다. 수로왕의 등장과 가야의 건국 과정이 드러나 있다. 삼국유사 속 수로왕의 생김새나 성장 속도를 보면 SF 영화 '스피시즈'에 등장하는 외계 생명체 같다. 가야 건국 이후 완하국(琓夏國)의 탈해(脫解)가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을 때 수로왕은 독수리, 새매로 변신해 싸워 물리쳤다고 하는데, 이는 마치 고대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의 신 호루스를 연상케 한다. 세계의 모든 탄생·건국 신화가 그렇듯이 도무지 믿기지 않지만 흥미롭고 신비하다. 수로왕의 재위 기간은 157년. 그는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경남 김해 도심 북쪽 구산동에는 수로왕이 탄강(誕降)한 구지봉이 있다. 해발 35m의 야트막한 구지봉에 오르면 평평한 정상부의 한가운데 어른 키만한 거북 머리 모양 바위가 서 있고, 남쪽에는 고인돌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받침돌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올린 고인돌은 마치 거북이 엎드린 형상이다. 수로왕 탄강에 앞서 기원전 4~5세기 통치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덮개돌에는 '구지봉석'(龜旨峯石)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조선의 명필 한석봉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약 2천 년 전 이곳에서는 주민 200~300명이 모여 하늘이 내려주는 왕을 기다리며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췄다. 수로왕은 구지봉 남쪽에 왕궁을 짓고 157년간 금관가야를 다스렸다.
◇ 하늘의 상제가 맺어준 인연
경남 창원 진해구 용원동 해안도로 가까이에는 망산도(望山島)라 불리는 섬이 있다. 섬은 주택단지를 배후에 두고 남쪽에 부산신항, 동쪽에 녹산국가산업단지를 두고 있다. 이곳은 인도에서 출발한 허황옥(許黃玉) 일행이 가락국을 찾아다니다 도착한 곳으로 전해진다. 망산도의 전체적인 모양은 거북 같다. 거북이 머리에 해당하는 곳에는 '望山島'(망산도)라 음각된 비석이 서 있다. 주변이 이렇게 현대적인 공간에 신화 속 장소가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아유타국(인도)의 공주는 어떻게 머나먼 이곳까지 찾아올 생각을 했을까. 어느 날 허황옥의 부모는 꿈속에서 하늘의 상제로부터 딸을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로 보내라는 계시를 받았다. 허황옥은 부모의 말을 따라 배 타고 고국을 떠났고, 바다의 끝과 하늘의 끝까지 찾아다니다 겨우 가락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허황옥이 탄 배는 망산도 서남쪽에서 붉은 돛을 달고 붉은색 깃발을 휘날리며 나타났다고 한다.
허황옥을 맞은 수로왕은 곧바로 궁궐로 가지 않았다고 한다. 망산도 인근 부산 강서구 명월산 북쪽 기슭에 있는 흥국사에 머무른 것으로 전해진다. 허황옥의 신행길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현재 흥국사의 주소는 '허왕후길 182'이다.
흥국사 대웅전을 마주하고 왼쪽에는 숙종 32년(1708) 세웠다는 '명월산흥국사사적비'가 있다. 비석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마모돼 현재 음각된 글자를 읽기 어렵다. 사적비의 내용은 흥국사 입구에 서 있는 안내판에는 볼 수 있다. "김수로왕이 48년에 명월산 고교(高橋) 밑에서 왕후 허 씨를 친히 맞아들여 환궁하였는데, 이때 허 씨는 입고 온 비단 바지를 벗어 이 산의 산신령에게 폐백을 올렸다고 한다. 왕은 허 씨의 아름다움을 달에 비유해 이 산의 이름을 명월산이라 하고, 명월사를 지어 새 왕조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한편, 부인과 세자를 위해 진국사와 흥국사를 창건했다고 한다"고 적혀 있다.
◇ 무척산 꼭대기 연못에 얽힌 전설
허황후는 서기 189년, 수로왕은 199년 세상을 떠났다. 각각 157세, 158세까지 장수하며 백년해로했다. 왕비가 죽은 후 수로왕은 늘 혼자 잠들며 슬피 탄식했고, 수로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은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다고 한다.
수로왕릉은 궁궐 동북쪽 평지에 조성됐다. 왕릉 조성과 관련한 전설도 흥미롭다. 능의 위치를 정하고 땅을 파자 물이 계속 솟구쳐 올라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 한 늙은 도사가 인근 가장 높은 산의 꼭대기에 연못을 파면 물길이 끊길 것이라고 해서 따랐더니 신기하게 이곳 물이 말라 장례를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이영주 문화관광해설사는 "전설에 따르면 당시 연못을 팠던 산은 무척산으로, 꼭대기에는 천지(天池)라 불리는 커다란 연못이 있다"고 설명했다. 또 "왕릉 뒤편에 현재 물을 좋아하는 왕버드나무가 많이 있어 이곳이 옛날 저습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수로왕릉은 높이 약 5m의 원형봉토분이다. 비문에는 '駕洛國首露王陵'(가락국수로왕릉)이 음각돼 있다. 묘비는 인조 25년(1647) 세워졌다. 왕릉 바로 앞에는 왕릉 출입구인 납릉정문이 있다. 정문 대들보 위쪽에는 흰색 석탑 양쪽으로 흰색 물고기가 마주 보고 있는 '신어문양'이, 그 위쪽에는 코끼리와 연꽃 문양이 그려져 있다. 특히 신어문양은 현재 인도 아요디아 시의 경찰 배지, 택시 번호판, 힌두교 사원 등 곳곳에서 사용되고 있어 허황옥이 인도에서 건너왔다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한다.
왕릉을 마주하고 오른쪽에 있는 숭선전(崇善殿)에는 수로왕과 수로왕비의 표준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수로왕과 전혀 인도인 같아 보이지 않는 수로왕비가 왕관을 쓰고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이다. 영정은 왕릉 북쪽 분산성에 있는 해은사 대왕전에서도 볼 수 있다. 이곳 영정은 조선 후기에 민화풍으로 그린 것으로, 한복을 입고 있고, 표정이 험상궂은 것이 인상적이다. 영정 앞에는 허황옥이 망산도에서 가져왔다는 봉돌이 놓여 있는데, 소원을 들어주는 영험함이 있다고 한다.
◇ 허황옥은 어디서 왔을까
수로왕비릉은 수로왕릉 북쪽 구지봉 아래쪽에 있다. 구지봉과 수로왕비릉의 전체적인 모습은 거북 모양이다. 구지봉은 거북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구수봉(龜首峯)으로도 불렸다. 일제는 거북 머리와 몸통을 끊어 도로를 내기도 했지만 1993년 도로를 터널 형태로 만들며 거북의 목은 다시 이어졌다.
왕비릉은 왕릉과 왜 함께 있지 않고, 왜 더 높은 곳에 있을까. 이영주 해설사는 "부부를 합장하는 풍습이 당시 없었다거나 왕비가 자기 나라를 그리워해 죽은 다음에라도 바다를 볼 수 있게 높은 곳에 묻었다거나 왕비가 권력이 더 막강했기 때문이다는 등 다양한 설이 있다"고 설명했다.
수로왕비릉의 크기는 수로왕릉과 비슷하다. 비문에는 '普州太后許氏陵'(보주태후허씨릉)이라 적혀 있다. 비문 속 '보주'는 무엇일까. 이영주 해설사는 "중국 쓰촨성 안악현의 옛 이름이 보주인 것으로 볼 때 인도 아유타국이 붕괴하면서 허 씨 일족이 쓰촨성으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고 했다. 물론 허황옥이 일본이나 발해만 일대, 낙랑 등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다.
왕비릉 아래에는 파사각(婆娑閣)이 있다. 내부에는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납작한 돌 다섯 개를 쌓아올린 파사석탑이 있다. 이 돌들은 허황옥이 인도에서 배를 타고 올 때 파도를 잠재우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원래 네모였지만 이후 뱃사람들이 풍랑을 막기 위해 돌을 떼가서 지금처럼 부정형이 됐다고 한다. 돌 표면을 보면 붉은빛이 감도는데 닭 볏의 피를 떨어뜨리면 굳지 않는다고 한다.
◇ 호기심 자극하는 왕궁터와 고분들
수로왕릉 남쪽에는 봉황동유적지가 있다. 회현리 패총과 가락국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를 합쳐 부르는 곳으로 가야시대 주거지, 고상가옥, 망루, 선박 등을 복원 설치한 곳이다. 최근 이곳 동쪽이 가야 왕궁터로 추정되며 관심을 끌고 있다. 이곳에서는 대형 건물지가 발견되고 가야시대 기와, 바퀴모양 토기, 송풍관(送風管), 연화문전돌 등 유물 400여 점이 출토됐다. 삼국유사에는 궁궐 동북쪽 평지에서 수로왕의 장례를 치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왕궁터 추정지는 수로왕릉에서 정확히 남서쪽에 있다. 허황옥이 거처했다는 중궁(中宮)과 인도에서 가져온 금은보화를 보관한 창고가 바로 이곳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봉황동유적지 북쪽에는 금관가야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대성동 고분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뒤편 대성동고분군이 자리한 구릉은 작은 구지봉이란 뜻으로 '애구지'라 불린다. 구지봉과 함께 금관가야인들이 신성시했던 장소로 추정된다. 박물관에는 대성동고분군에서 발굴된 널무덤, 덧널무덤 등의 모형, 토기와 세형동검, 목걸이 등 다양한 부장품이 전시돼 있다. 인골을 통해 디지털로 복원한 금관가야인의 모습도 흥미롭다.
한편 김해가야테마파크에서는 수로왕과 허황옥을 만나고 가야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다. 수로왕과 허황옥의 운명적 만남과 사랑을 주제로 펼쳐지는 뮤지컬 '미라클러브Ⅱ'는 인도를 떠올리는 현란한 발리우드 댄스와 인도 음악, 무술 퍼포먼스, 화려한 특수효과 등으로 관객을 2천 년 전으로 떠나게 한다. 당시 무역 허브였던 가야의 이야기가 담긴 '가야스토리관', 허황옥의 신행길을 추적하는 '허왕후 스토리관', 인도의 역사·문화·종교를 엿볼 수 있는 '인도갤러리'도 둘러볼 만하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dklim@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