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을 미술관으로 불러낸 폴란드 거장…"'나의 소원'에 매료"
보디츠코,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약자 목소리 듣게 하는 게 내 일"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검은 장막을 걷고 들어가면, 높이 3.5m 남짓 되는 조각상 하나가 어둠 속에서 솟아오른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둥근 얼굴에 둥근 안경테를 걸친 그 모습은 익숙한데, 작은 흐느낌이 들려와 조각상 앞에 선 이들을 놀라게 한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폴란드 거장 크지슈토프 보디츠코(75)의 전시 '기구, 기념비, 프로젝션'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작품 '나의 소원'이다.
이 작품은 백범 김구가 '백범일지' 말미에 쓴 동명의 글에서 따왔다. 작년 6월 서울 용산의 백범 김구 기념관을 찾은 보디츠코는 '나의 소원' 영문판을 읽은 뒤 깊은 인상을 받았다.
"통일된 한국을 그리는 그(백범)의 비전에 매료됐습니다. 그는 기쁨의 국가, 생각을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매우 민주적인 국가를 구상했습니다. 그가 그린 통일 한국은 힘이 세거나 제국주의적인 국가가 아니라, 국민의 건강과 아름다움, 문화에 초점을 맞춘 국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디츠코는 전시 개막을 하루 앞둔 4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신작 '나의 소원' 등을 소개하고 자신의 예술 철학을 설명했다.
보디츠코는 한국인들이 각자 바라고 원하는 사회상을 작품 '나의 소원'에 담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세월호 유가족과 성 소수자, 탈북 예술가, 해고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등 모두 상처받고 찢긴 경험이 있는 이들이다. 이들의 인터뷰 영상을 투사해 스티로폼과 우레탄 등으로 된 백범의 조각상에 입힌 것이다.
이는 사회적 약자들이 공적인 공간에서 발언할 기회를 마련한 작품으로 명성을 쌓아온 보디츠코의 작품 세계와 닿아 있다. 2부 '기구' 전시장에 설치된 '노숙자 수레'(1988)는 대표작으로 언급되는 작품이다. 기록적인 한파 속 뉴욕의 빈 빌딩 앞에서 폐타이어를 태워 몸을 녹이는 노숙자들을 목격한 작가는 숙식이 가능한 수레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길에서 사는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었다. 3부 '공공 프로젝션' 전시장에서는 원폭 피해 여성, 특히 재일 조선인의 목소리가 담긴 영상 '히로시마 프로젝션'(1999)이 상영 중이다.
보디츠코는 "(프로젝션) 프로젝트의 목표 중 하나가 많은 사람의 목소리와 경험을 다른 곳으로 확장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이번에는 그 무대를 서울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보디츠코가 유독 '말하기'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과의 사전 인터뷰에서 이같이 설명했다.
"'평소에' 노숙인, 불법 이민자, 참전 군인의 말을 들으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듣게 할 만한 특별한 미학적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제가 하려는 일입니다. (중략) 낯선 이들의 경험이 표현되고 공개될 때 우리는 마음속에서 억눌리거나 친숙해서 피한 것들을 귀 기울이고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주요 작품 80여 점을 망라하는 이번 전시는 보디츠코의 첫 한국 전시이면서 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이다.
세월호 팔찌를 찬 작가는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의 의미를 이같이 소개했다.
"대규모 집회나 시위를 통해 공공장소들이 정치적으로 활기를 띠곤 합니다. 이러한 프로젝트가 시위나 집회가 열리는 사이사이에 열리고, 이를 통해 많은 사람이 직접 만나고 입장을 교환한다면 시위나 집회가 일어날 이유와 조건이 조금은 줄지 않을까요."
전시는 10월 9일까지. 문의 ☎ 02-3701-9571.
aira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