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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역사 2cm] 손기정 81년 전 서울역 기차로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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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역사 2cm] 손기정 81년 전 서울역 기차로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다

(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문재인 대통령이 9년간 끊어진 남북 경의선 철도를 복원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다.

문 대통령은 6월 중순 제주도 연설에서 아시아 극동 종착역인 한반도가 철도로 연결될 때 새로운 육상·해상 실크로드가 완성된다고 강조했다.

남북 철로는 1951년 서울-개성 노선 폐쇄 이후 처음으로 2007년 경의선 열차가 운행됨으로써 복원됐으나 이듬해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 여파로 다시 차단됐다.

경의선 철도는 부분 보수만 하면 곧바로 운행할 수 있으나 북핵 문제와 국제사회 대북 제재 등 걸림돌 해소는 간단치 않다.






남북 철도 연결은 중국이 강력하게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에 힘을 싣는 것으로 한반도뿐 아니라 아시아 역내 경제 발전과 평화 정착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대일로는 유라시아대륙 동서남북을 잇는 육상 실크로드 '일대'와 인도양을 건너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해상 실크로드 '일로'로 구성된다.

경의선 복원은 금강산, 원산·청진·나선을 남북이 공동 개발하고 서울-베이징 고속교통망을 건설해 한반도를 동북아 산업·물류·교통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문 대통령 공약과도 맞물린다.

한반도 종단 철도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연결하는 통합프로젝트에 러시아도 적극적으로 협력할 계획이어서 육상 실크로드 성패의 최대 변수는 북한인 셈이다.

66년 전까지만 해도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프랑스까지 갈 수 있었다.

부산-서울-신의주-단둥-봉천-하얼빈-모스크바-파리를 연결하는 철로가 운영된 덕분이다.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철도를 건설한 주체는 일제였다.

중국과 한반도에서 수탈한 물자 수송 등을 위해 주요 지점을 거미줄처럼 엮은 철도망을 구축한 것이다.

1911년 압록강 철교가 완공된 이후에는 만주철도가 조선 국경을 넘어 한반도까지 관통했다.

이로써 일본 도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베를린, 파리로 가는 열차 승차권을 살 수 있게 됐다.

일본 수도에서 유럽까지 어떻게 철도편으로 갈 수 있었을까?

먼저 도쿄 신바시 역을 출발하는 국제열차에 올라타 오사카를 거쳐 시모노세키로 간다.

시모노세키부터 부산까지는 바닷길로 이동한다.

부산역에서 다시 국제열차에 탑승하면 서울-평양-신의주를 지나 만주 신징(창춘)까지 내달릴 수 있다.

신징역에서는 하얼빈까지 간 다음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연결되는 기차로 갈아탄다.

도쿄에서 하얼빈까지 가려면 닷새가량 걸리지만, 열차와 배를 여러 번 바꿔 타므로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하얼빈부터 러시아 모스크바까지는 사정이 달라진다. 일단 탑승하면 꼬박 11일 동안 기차 안에 갇힌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국경을 통과할 때 시간과 비용 소모가 크다.

국가와 주요 지역별로 철도 폭(궤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궤간은 크게 표준궤(1,435㎜)를 기준으로 넓으면 광궤, 좁으면 협궤로 불린다.

영국이 1846년 법으로 지정한 표준궤 폭은 말 2마리가 끄는 마차 축과 같다.

고대 로마 전차 시대부터 내려온 이 궤간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대부분 유럽 국가와 미국에서 채택했다.

스페인과 러시아는 표준궤를 거부했다.

나폴레옹 집권 이후 군사 강대국으로 부상한 프랑스 침략 위협에 대비한 조처였다.

두 나라는 광궤를 선택한다.

프랑스군이 기차에 군수 물자와 군인을 싣고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차단하거나 이동 시간을 늦추기 위해서다.

중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표준궤를 사용했으므로 한중 국경 통과는 문제없으나 러시아나 몽골로 가려면 열차를 교체해야 했다.

모스크바에서 베를린과 파리로 여행할 때도 열차를 갈아타느라 각각 2일, 3일이 걸렸다.

세계 최장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바닷길보다 시간과 비용을 3배가량 절약하고 뱃멀미를 피할 수 있어서 인기가 높았다.

안중근 의사가 한반도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려고 하얼빈에 갔을 때도 만주횡단철도를 이용했다.

만주철도와 시베리아 횡단 철도 승객은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이 대부분이었으나 한국인도 적잖았다.

망국의 한을 품고 만주로 옮아온 독립운동가와 가족, 생계 문제로 한반도를 떠난 이주민 등이 국제열차를 이용했다.

1937~1939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으로 쫓겨난 고려인 1만7천여 명도 국제열차에 실렸다.

6·25전쟁 당시 프랑스인 종군기자 라캉의 저서를 보면 서울·유럽 육상교통이 얼마나 활발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휴전협상을 취재하기 위해 1951년 7월 서울에 도착한 라캉은 폐허가 된 서울역에 들렀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역무실 한구석 캐비닛에서 파리행 기차표 뭉치를 발견한 것이다.

서울에서 출발해 신의주, 단둥, 봉천, 하얼빈, 모스크바를 거쳐 파리로 이어지는 대륙횡단 기차표였다.

조선 여성 최초로 유럽 여행길에 오른 나혜석(1896~1948년)도 기차를 타고 프랑스를 다녀왔다.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나혜석은 외교관 남편 김우영을 따라 1927년 서울역을 출발해 프랑스로 떠났다.

그림, 글, 시 등 여러 방면에서 재주를 보인 나혜석은 남존여비 인습에 갇힌 여성의 권리의식을 일깨우는 데 앞장선 신여성으로 유명하다.

고향인 경기도 수원에는 그를 기념하는 나혜석 거리가 조성됐고 그곳 입구에는 동상과 조형물 등이 세워져 있다.






마라톤 영웅 손기정(1912~2002년)도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할 때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이용했다.

일본에서 출발한 손기정은 어떻게 해서 베를린까지 갔을까?

도쿄에서 기차와 배를 갈아타고 부산에 도착한 뒤 경부선 열차에 올라 서울로 이동했다.

서울에서 베를린을 향해 떠난 것은 올림픽 개막을 약 두 달 앞둔 1936년 6월 4일이었다.

마라톤 코스 답사 등 현지 적응 훈련을 위해 다른 종목 선수보다 먼저 출발했다.

서울역에서는 모교인 양정고보 전교생과 교직원, 시민들이 몰려와 우렁찬 박수를 치며 우승을 기원했다.

열차가 신의주에 왔을 때도 열렬한 환송 행사가 있었다.

손기정 일행을 태운 기차는 국경을 넘어 단둥, 봉천, 하얼빈을 거쳐 6월 8일 소련과 인접한 만주리에 다다른다.

이어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해 다음 목적지인 모스크바로 향했다. 손기정은 열차가 멈출 때마다 내려서 철길을 따라 뛰었다고 한다. 장기간 움직이지 않아 몸이 굳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그러다가 소련 철도망을 염탐하려는 스파이로 오해받아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서울을 떠난 지 열흘 만에 모스크바에 당도한 손기정은 유럽행 열차로 갈아타기 위해 이틀간 열차에서 머물러야 했다.

손기정은 천신만고 끝에 7월 17일 베를린에 도착했으나 곧바로 나라 잃은 설움을 톡톡히 겪게 된다.

마중 나온 베를린 주재 일본 대사관 직원들이 "왜 마라톤에 조선인이 두 명이나 끼었느냐"고 핀잔을 줬다.

일본 마라톤 선수단 3명 가운데 손기정과 남승룡 등 2명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강한 불만을 터트린 것이다.

손기정은 치욕을 느꼈지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어금니를 악물고 삼킨 분노는 운명의 날인 8월 9일 마라톤 코스에서 기록으로 폭발했다.

우승 후보로 꼽히던 아르헨티나 선수를 줄곧 뒤쫓아가다가 후반 막바지 난코스인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모험을 감행해 기적을 일구게 된다.

당시 마라톤에서 마의 벽이라 여겨진 2시간 30분대 기록을 깨고서 금메달을 따낸 것이다.

선두 그룹에서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며 손기정을 도왔던 남승룡은 3위를 차지한다.

비록 일장기를 달고 뛰었지만, 조선인으로서 국제대회에서 거둔 최고 쾌거였는데도 이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시상대에서는 일본국가 연주와 함께 일장기가 올라가자 손기정은 우승자에게만 주는 월계수를 가슴 쪽에 갖다 댔다.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감추기 위해서다.

외신 기자 인터뷰에서 출신 국가를 한국이라고 밝힌 손기정은 일본 선수단 축하 파티를 피해 조선인 두부 공장을 찾아 동포들과 함께 조촐하게 자축했다.






손기정은 우승 다음 날 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통을 만났는데 나치 학살 이전이라서 그런지 비교적 호평을 했다.

"손이 크고 억셌으며 체구는 우람했다. 독일을 이끌어가는 통치자답게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당시 동아일보는 손기정 우승 소식을 보도하면서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 버린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무기정간을 당했다.

손기정의 귀국 행로는 갈 때와 완전히 달랐다.

기차를 타고 귀국했다면 열차가 멈추는 곳마다 환영 인파가 몰렸을 텐데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울 것을 우려한 조선총독부가 미리 손을 쓴 탓이다.

귀국 교통편은 열차 대신 비행기로 바뀌었고, 이동 경로도 베를린-인도-싱가포르-일본-조선으로 변경됐다.

손기정은 일본에서 항공편으로 울산으로 갔다가 다시 여의도로 이동했다.

당시 여의도는 마포와 육교로 연결되지 않아 시민 접근이 어려웠다.

그나마 공항 주변까지 일본 경찰이 철저하게 통제한 탓에 손기정을 환영한 사람은 친형과 양정고보 교장뿐이었다.

공항을 벗어나서도 경찰 감시와 미행을 당하느라 그날 전교생이 대규모 환영행사를 준비한 양정고보에는 들르지도 못했다.

고국에서 환영은커녕 죄인 취급을 받자 마라톤 금메달을 반납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고 한다.

그때는 나라를 빼앗겨 철길 대신 하늘길을 강요받았다면 지금은 남북이 분단돼 육로가 봉쇄됐다.

분단 이후 남한 사람은 중국과 러시아 평원을 지나 유럽까지 이어지는 철길을 질주하며 호연지기를 키울 기회를 상실했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만나는 대륙 육로가 끊긴 탓에 한국인 의식이 폐쇄적이고 편향됐다는 지적도 있다.

경의선 복원은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 경제교류를 활성화하는 데 지렛대 역할을 할 뿐 아니라 한국인의 속 좁은 의식구조를 개선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주변 강대국까지 얽힌 문제라서 해법이 복잡할 것 같지만 의외로 간단할 수도 있다.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멈추고 미국이 주먹 대신 대화를 앞세운다면 머잖아 서울역에서 파리행 기차표를 살 수 있게 된다.

hadi@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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