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훈의 골프산책] 도 넘는 관전 태도, 이제는 대책 세울 때
(서울=연합뉴스) 권훈 기자= 지난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대회 서든데스 연장전에서 A 선수가 파퍼트에 실패했다. 상대 선수 B는 한 뼘 거리 파퍼트를 남겨놓고 있었다.
순간 몇몇 관객이 큰 소리로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B 선수를 응원하던 관객이었다.
지난 4월 열린 KLPGA투어 대회에서 C 선수와 동반 플레이를 펼치던 D 선수는 도저히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C 선수를 응원하는 관중이 자신의 실수가 나올 때마다 신나게 박수를 쳤기 때문이다.
KLPGA투어 E 선수는 그린 주변에서 짧은 칩샷을 하다 뒤땅을 쳤더니 지켜보던 관객에게 "장애인이냐"는 비아냥을 들었다고 하소연했다.
국내 프로 골프 대회 관전 문화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골프 관전 에티켓의 기본은 선수의 실수에 비난이나 야유를 자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골프 대회에서는 이런 기본 에티켓은 자주 무시된다.
"프로가 그것도 못 넣나"라거나 "프로라도 별거 없네!" 같은 말은 이제 웬만한 프로 선수는 들어도 그러려니 넘어가는 수준이다.
골프 관전의 에티켓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의 경쟁 선수도 배려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선수도 우승을 다투던 동료의 실수가 나오면 표정을 관리한다.
지난 11일 김지현(26)은 S-오일 챔피언십 연장전에서 이정은(21)의 3퍼트 보기 덕에 우승했다. 김지현은 이정은을 껴안고 다독였다. 이렇게 골프 대회에서 승자가 패자를 위로하는 광경은 아주 흔하다.
그렇지만 일부 관객은 이런 배려와 아량은커녕 언어폭력에 가까운 언사도 서슴지 않는다.
선수 경기력에 대한 야유와 극성 응원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지난해 이른바 '가방 게이트'로 고통을 받은 장하나(25)는 국내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대회 마지막 날 18번 홀 그린에서 한 관객의 야유에 눈물을 쏟아냈다.
얼마 전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 홈페이지에 부친의 잘못에 용서를 빌었던 김해림(28)은 한국여자오픈 최종 라운드 1번홀 티잉 그라운드에서 부친을 언급하는 고함을 들었다. 김해림의 표정은 금세 얼어붙었다.
명백한 인신공격이다. 선수의 경기력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더구나 선수 가족을 들먹이는 인신공격성 언사는 인권 침해나 모욕이다.
문제는 이런 선수에 대한 인신공격성 언사가 부쩍 늘었다는 사실이다.
선수 몸매 등 외모를 비하하거나 옷차림을 두고 성희롱성 발언을 큰소리로 내뱉는 관중도 더러 있다.
더 큰 문제는 늘어나고 있는 매너 없는 공격적 응원이나 선수의 인권 침해 또는 모욕성 언사에 대한 대책이 너무 미흡하다는 점이다.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는 작년부터 선수 팬클럽에 상대 선수를 야유하는 방식의 공격적 응원을 자제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또 많은 팬클럽은 매너 응원 운동을 자체적으로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게릴라처럼 튀어나오는 인권 침해나 인격 모욕성 언사는 더 많아지고 강도가 더 세졌다.
세계에서 가장 프로 골프 대회가 많이 열리는 미국에서도 이런 관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주 드물다.
대부분 관객은 골프 경기 관전 매너를 잘 숙지하고 지킨다. 그렇지만 더 큰 이유는 선수가 단순히 불쾌감을 느끼는 언사에도 안전 요원이 해당 관객을 경기장 밖으로 몰아내는 단호한 조처를 하기 때문이다.
인권 침해나 인격 모욕성 언사는 형사처벌 대상까지 된다.
국내 골프 대회에서 관객이 경기장 밖으로 쫓겨나는 일은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다.
그나마 몇 되지 않는 퇴장 관객은 진행 요원에게 욕설하거나 폭력을 행사한 경우다.
선수에 대한 야유나 인격 모욕성 언사는 거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상당수 선수는 관객의 언어폭력에 상습적으로 노출된다.
대부분 20대 초반에서 중반인 어린 선수들은 대응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마음의 상처를 입기 일쑤다.
F 선수는 "몸매를 놓고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경기 내내 샷이 제대로 되질 않았다"고 털어놨다.
G 선수는 "팬들에게 멋진 샷과 매너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애쓰고 있지만, 인격 모욕까지 당해도 마냥 참는 게 팬 서비스는 아닌 것 같다"고 밝혔다.
이제 협회와 대회 주최 측이 나서야 할 때라고 선수들은 말한다.
F 선수는 "솔직히 그런 관객은 골프 경기를 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러나 선수가 직접 나서서 관객을 퇴장시킬 수는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우선 인격 모욕이나 인권 침해성 언사가 골프 경기에서는 해서는 안 된다고 알리는데 행동을 취해야 한다.
지금도 골프 경기장 입장 관객에게는 관전 매너를 주지시키는데 적지 않는 노력을 기울인다.
몇 년째 이어온 노력 덕분에 골프 대회장에서는 흡연, 핸드폰 벨 소리, 카메라 셔터 소리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꾸준한 계몽 덕분에 대형 우산을 들고 관전하는 바람에 다른 관객의 시야를 가리는 후진적 현상도 차츰 줄어드는 추세다.
성숙한 골프 경기 관람 문화는 자발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계몽과 교육을 통해 이뤄졌다는 뜻이다.
협회와 대회 주최 측은 선수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언사가 명백한 경기 방해 행위이며 경기장 퇴장 대상이 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과거 선수들은 미국이나 일본 대회에 다녀오면 코스와 연습장 등 시설에 대한 부러움을 주로 피력했다.
요즘 선수들은 한결같이 관객 매너를 말한다. 그들은 "거기서는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관객에게 더 친절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여자프로골프투어는 최근 대회가 늘어나고 경기장을 찾는 관객이 많아지면서 전례가 없는 호황을 누린다.
그러나 선수들이 언어폭력이 난무하는 관전 문화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면 장래가 어둡다.
kho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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