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라, 그날의 포성을'…6·25 산동교 전투 재현
북한군 탱크에 맞서 총알 바닥날 때까지 공방…광주 유일 6·25 전적지
(광주=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 6·25 한국전쟁이 터지고 약 한 달이 흐른 1950년 7월 23일 새벽.
빠른 속도로 남하하던 북한군 제6사단 병력 일부가 '남도의 젖줄' 영산강을 가로지르는 산동교에 이르렀다.
1934년 건설한 산동교는 광주와 장성을 잇는 신작로(현 국도 1호선) 한 구간이자 광주 관문이다. 호남지역에서 낙동강 전선으로 진출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구릉에 포진한 우리 군경 1개 대대 500여명은 탱크 3대를 앞세우고 야포부대를 이끌며 트럭 27대에 나눠탄 북한군을 기다렸다.
병사 3명 가운데 1명만 무기를 소지한 군경은 전력 열세 속에서 인민군 진격을 최대한 늦추고자 오전 4시께 다리를 폭파했다.
교전은 그로부터 2시간 뒤 시작했다. 열악한 무장으로 압도적 화력을 지닌 북한군에 저항했다.
북한군 집중포화에도 총알이 바닥나 순천으로 퇴각할 때까지 공방을 주고받았다.
정오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30여명이 전사하고 약 50명이 다쳤다.
군경은 북한군 전진을 끝내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5시간가량 벌인 전투로 시민이 몸을 피하고 물자를 옮기는 시간을 벌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조귀보(87)씨는 오랜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는 광주시민에게 피난 기회를 주기 위해 산동교를 거점 삼아 방어했다"고 증언했다.
67년 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이곳은 지금 시민 건강·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광주의 유일한 6·25 전쟁 전적지로서 역사 아픔을 간직한 나라사랑 교육 장소로도 활용하고 있다.
광주지방보훈청은 16일 광주 북구 동림동 옛 산동교 앞 친수공원에서 '리멤버 산동교, 그날의 포성!'이라는 주제로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행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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