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혹하면서도 우아한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영화 '엘르'
(서울=연합뉴스) 김희선 기자 = 오는 15일 국내 개봉하는 '엘르'는 '원초적 본능'(1992)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출신 노장 폴 버호벤 감독의 신작이다.
'로보캅', '토탈리콜', '원초적 본능'을 잇따라 발표하며 할리우드 정상에 오른 후 부침을 겪었던 그는 이 작품으로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고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과장된 폭력 묘사와 대담한 성적 표현으로 유명한 폴 버호벤 감독의 작품답게 첫 장면부터 충격적이다. 복면을 쓴 괴한이 여주인공 미셸(이자벨 위페르 분)의 집에 침입해 그녀를 무자비하게 성폭행하고 유유히 사라진다.
하지만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다음이다. 성폭행당한 미셸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깨진 접시를 치우고 자신의 옷을 쓰레기통에 처넣은 뒤 거품이 담긴 욕조에 들어가 다리 사이로 흐르는 피가 섞인 거품을 바라본다. 성폭행 사건을 경찰서에 신고하는 대신 병원에 가서 성병 검사를 하고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성폭행당한 것 같다고 태연하게 말한다.
관객의 예측을 뒤엎는 미셸의 행동 뒤에는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상처가 있다.
잘 나가는 게임회사 '크로노스'의 최고경영자(CEO)인 이혼녀 미셸은 39년 전 이유 없이 이웃 주민들을 살해한 연쇄 살인마의 딸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뒤틀린 삶을 살아왔다. 괴한의 성폭행 사건과 함께 아버지의 가석방 신청으로 잊혔던 살인사건이 재조명되면서 그토록 벗어나려 했던 과거의 악몽은 다시 그녀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미셸은 성폭행 사건을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자신이 직접 복수하기 위해 범인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이 영화의 핵심은 아니다. 범인의 정체는 이미 중반부에 드러난다. 범인보다 더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허를 찌르는 주인공 미셸이다. 그녀의 과거와 현재, 복잡하게 얽힌 주변 인물들을 통해 미셸이라는 인물의 뒤틀린 삶과 욕망을 들여다보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미셸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들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복수를 가하면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를 비틀고 전복시킨다. 피해자가 된 상황에서도 전혀 움츠러들거나 동요하지 않는 미셸은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게임의 주도권을 잡고 상황을 이끌어나간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끝없이 이어지는 애매모호함"이라는 주연 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말처럼 단서를 제공하되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폴 버호벤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이번 영화에서도 변함없다.
이 작품으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이자벨 위페르는 그 애매모호함의 중심에 있는 주인공 미셸을 군더더기 없는 연기로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여러 사건에 난타당하면서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강인함을 지닌 여성, 냉소적이면서도 관대하고, 냉정하면서도 다정하고, 독립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의존적인,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캐릭터를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차가운 연기로 그려내면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폴 버호벤 감독은 이 작품을 할리우드에서 찍으려고 계획하고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샬리즈 시어런, 샤론 스톤 등을 캐스팅 리스트에 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도덕점 관념을 넘어서는 당혹스럽고 복잡한 캐릭터에 제안을 받은 배우들이 모두 난색을 표해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던 차에 이자벨 위페르가 미셸 역에 관심을 표하면서 이 작품은 위페르를 주인공으로 한 프랑스 영화로 탄생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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