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비아의 로렌스'가 펼치는 중동의 첩보전
신간 '아라비아의 로렌스' 출간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친숙한 영국인 T.E. 로렌스(1888∼1935)는 오늘날 중동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1차 대전 당시 로렌스는 영국의 정보요원이었지만 아랍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운다. 종전 후 로렌스는 당연히 아랍의 독립을 주장했지만열강의 탐욕 속에 그의 노력은 수포가 되고 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중동의 국경선을 그었다. 이른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통해 부족과 종교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제멋대로 그어진 국경선은 현대 중동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분쟁의 씨앗이 됐다.
그러나 로렌스는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외에는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다. 외국에서는 그를 연구하는 책이 여러 권 나왔지만, 국내에서는 자서전 '지혜의 일곱기둥'이 번역됐을 뿐이며 이마저도 현재는 절판 상태다.
미국의 국제분쟁 전문 기자이자 소설가인 스캇 앤더슨이 펴낸 '아라비아의 로렌스'(글항아리 펴냄)는 그동안 영화로만 피상적으로 접했던 로렌스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책이다.
영화에는 생략된 내용이지만 로렌스는 원래 영국 옥스퍼드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촉망받는 고고학자였다. 1차대전 와중 입대한 그는 영국이 오스만제국을 파멸로 이끌기 위해 아랍 민족 운동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중동의 소용돌이 속 중심에 서게 된다.
주인공은 로렌스지만 책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세 명의 또다른 젊은이들도 무대로 끌어올려 당시 중동 정세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중동을 둘러싼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이집트 카이로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일했던 쿠르트 프뤼퍼는 '언어의 천재'였다. 6개 언어를 구사하고 아랍어에도 능통했던 그는 훗날 중동의 독일 첩보조직 책임자가 된다.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인 농업과학자 아론 아론손은 열렬한 시온주의자였다. 그는 팔레스타인 땅을 오스만제국으로 빼앗아 유대인 조국을 재건하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오스만 정부에는 농업 문제 자문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오스만의 적국인 영국에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전역에 첩보망을 구축하는 역할을 했다.
마지막 인물은 미국인 윌리엄 예일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미국 예일대를 세운 예일 가문의 일원이었지만 집안이 몰락하면서 스탠더드오일이라는 미국 기업에서 일하게 된다. 중동의 유전을 차지하기 위해 스탠더드오일이 은밀하게 파견한 직원이었던 그는 중동에서 단 한 명뿐인 미국인 정보요원으로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게 된다.
책은 네 젊은이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오늘날 중동이 갈등과 혼돈의 무대가 된 과정을 소설처럼 그려낸다. 900쪽 가까운 분량이지만 각국이 벌이는 첩보전 등 영화 같은 이야기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책장이 넘어간다.
원제는 'Lawrence in Arabia'다. 'Lawrence of Arabia'라는 영화 제목을 비튼 것으로 로렌스를 영웅시하거나 서구 중심적 시선이라는 비판을 받은 영화와는 달리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려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옮긴이 정태영씨는 "이 책이 선사하는 가장 중요한 즐거움이자 차별성이라면 마치 소설에서 튀어나온 듯한 생생한 인물들을 통해 '로렌스의 시절'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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