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사정 좋아지는데 왜?" 선진국 물가 또다시 지지부진
유가·임금상승률 슬럼프 탓…테이퍼링·금리인상 등 통화정책에 영향 가능성
(서울=연합뉴스) 김경윤 기자 =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의 물가상승률이 올해 초 분위기와는 달리 다시 꺾이는 모양새다.
실업률은 역대 최저 수준을 기록했고 경제성장률 등 주요 지표도 나쁘지 않은 상황에서 물가만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최근 미국 셰일오일 증산 속에 국제유가가 흔들리고 선진국 전반의 임금상승률이 둔화한 것이 물가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경제 회복 분위기를 타고 기준금리 인상과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 카드를 고려하던 선진국 금융당국은 물가지표 부진에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 유로존 5월 소비자물가 올들어 최저…ECB 테이퍼링 물 건너가나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물가상승률이 다시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유럽연합(EU) 공식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유로존 5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1.4% 상승해 올해 들어 가장 낮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이는 전월치인 1.9%에 비해 한참 낮고, 이코노미스트 전망치인 1.5%도 밑도는 수치다.
유로존 CPI 상승률은 올 1월 1.9%, 2월에는 유럽중앙은행(ECB)의 목표치인 2.0%까지 오르며 희망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5월에는 시장 전망치를 밑도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 이 같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물가상승률이 다시 주저앉으면서 ECB의 테이퍼링 일정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그간 독일과 네덜란드는 마이너스 금리에서 벗어나고 테이퍼링을 시행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반면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현재 물가상승률이 유가 상승에 기댄 것으로 탄탄하지 않다며 신중론을 펼쳐왔다.
드라기 총재는 지난주에도 유럽의회 의원들에게 유로존의 경제 여건이 나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특수한 통화정책을 유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번 5월 CPI는 드라기 총재의 신중론을 뒷받침하는 셈이다.
당장 ECB는 이달 8일 회의를 열고 통화정책 방향에 대해 논의한다.
이번 회의는 프랑스 대통령 선거 결과가 나온 이후로 처음 열리는 ECB 회의로, 유로존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일단 해소된 가운데 ECB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테이퍼링에 나설지를 결정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시장 전문가들은 전망했다.
◇ 미국 근원 소비자물가 1년 반 만에 2% 아래로…근원 PCE도 '비틀'
이달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이 커지는 가운데 미국 물가지표에도 노란 불이 들어왔다.
4월 미국의 CPI 상승률은 2.2%로, 유로존과 마찬가지로 올해 들어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미국 CPI 상승률은 2월 2.7%에서 3월 2.4%, 4월에는 2.2%로 연속 하락했다.
같은 달 에너지와 음식 가격을 제외한 근원 CPI는 전년 대비 1.9% 상승했다.
근원 CPI 상승률이 2%를 밑돈 것은 2015년 10월 이후로 1년 6개월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연준이 선호하는 지표인 근원 개인소비지출(PCE) 상승률도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4월 근원 PCE는 지난해보다 1.5% 상승해 2015년 12월 이후 가장 약한 상승세를 보였다.
근원 PCE는 2월 1.8%, 3월 1.6%에서 4월 1.5%까지 내리면서 역시 연속 하락했다.
시장에서는 이 같은 상황에서도 연준이 이달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이 집계한 미국 연방기금금리 선물시장에 반영된 6월 기준금리 인상확률은 2일 기준 100%를 유지하고 있다.
제롬 파월 연준 이사도 1일 뉴욕 이코노믹 클럽에서 "인플레이션율이 5년째 목표치에 미달하며 2%를 향해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면서도 미국 경제가 건전하고 금융위기 시대의 부양책에서 벗어나 정상화를 꾀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 日 대졸자 취업률 98%인데도 물가상승률은 여전히 0%대
일본의 4월 CPI는 지난해 동월보다 0.4% 상승했다. 이는 일본은행 목표치인 2%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수치다.
앞서 2월과 3월에도 물가상승률은 각각 0.3%, 0.2%에 불과했다.
'아베노믹스'에 따른 대대적인 양적완화에도 물가상승률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일본은행은 이미 물가상승률 달성 시기를 2018년 이후로 미뤄둔 상태다.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리는 장기침체를 경험한 이후로 소비가 얼어붙으면서 물가도 제자리걸음 중이다.
당국은 여전히 고용률 증가가 물가를 견인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하라다 유타카(原田泰) 일본은행 금융정책위원은 일본의 실업률이 2%에 근접하면서 자연히 물가상승률도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라다 위원은 1일 일본 기후(岐阜)현에서 기업인들과 만나 "일본의 실업률은 이미 2.8%"라며 "이 같은 추세가 이어지고 실업률이 더 떨어진다면 물가가 오른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의 취업률은 현재 더없이 높은 상태다.
올해 4월 1일 기준으로 3월 대졸자의 취업률이 97.6%, 고졸자 취업률은 99.2%로 모두 20여년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한 달 사이에 대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자 대부분이 일자리를 찾은 셈이다.
실업률이 더 떨어지기도 어려울뿐더러 2%까지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물가상승률이 일본은행의 목표치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실업률은 이미 역대최저급…지지부진 물가는 국제유가·임금상승률 탓
각국 금융당국은 고용지표 호조가 물가 상승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기대해왔지만 이미 실업률은 십수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미국의 5월 실업률은 4.3%로 2001년 5월 이후 약 16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이는 애널리스트 예상치였던 4.4%보다도 낮은 것이다.
유로존의 경우 4월 실업률이 9.3%로 금융위기 여파가 유럽을 휩쓸었던 2009년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일본은 올해 대졸자 100명 가운데 98명, 고졸자 100명 가운데 99명이 취업하는 경이로운 수치를 기록했다. 4월 실업률 역시 2.8%로 1994년 6월 이후 23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문제 요인으로는 국제유가와 임금상승률이 지목된다.
유로존 5월 CPI 세부항목을 들여다보면 CPI 상승률이 4월 1.9%에서 다음달 1.4% 떨어진 데는 에너지 가격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미국 셰일오일 업계의 산유량 증산과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의 감산 연장을 둘러싸고 국제유가가 출렁이면서 이 같은 결과를 부른 것으로 보인다.
배럴당 50달러를 웃돌던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근월물 가격은 5월 들어 장중 배럴당 43.36달러까지 떨어진 바 있다.
또 4월에는 부활절 연휴로 항공료가 오르면서 서비스 분야 소비자 가격이 올랐지만, 이 같은 효과가 5월 들어 꺼진 것도 영향을 끼쳤다.
일본과 미국에서는 낮은 임금상승률이 문제로 꼽힌다.
일본은 기업들이 영업시간을 줄이고 파트타임이나 비정규직을 늘리면서 임금이 오르지 않고 가계 지출 역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의 500명 이상의 대기업 정규직 임금 상승률은 0.6%에 그쳤다.
미국의 5월 시간당 임금은 전월보다 0.15% 오른 26.22달러였다. 이는 시장 예상치인 0.2%보다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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