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6일 전쟁'과 재외국민의 6·25 참전사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7년 6월 5일 오전 7시 45분. 레이더를 피해 낮게 날아 멀리 지중해를 돌아온 이스라엘의 전폭기들이 이집트군에 파상공격을 퍼부었다. 하루 전날 이스라엘은 해병들이 일요일을 맞아 대부분 휴가를 가는 것처럼 관련 사진을 세계 언론에 전송하는가 하면 당일 아침 극히 평화로운 내용의 정부 발표문을 내놓았다. 이스라엘의 기만전술에 손 놓고 있던 이집트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저녁 무렵까지 300기가량의 이집트 공군기가 잿더미로 변했다.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의 비행장들도 공습해 100여 기의 전투기를 폭격했다. 이스라엘 공군기의 피해는 19기에 불과했다.
지상전에서도 이스라엘군은 파죽지세였다. 동쪽으로 8일 요르단에 있는 예루살렘을 점령해 '통곡의 벽' 앞에서 감사 기도를 올렸고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를 빼앗았다. 북쪽으로는 골란고원에서 시리아군을 몰아냈다. 승부처는 8만 명의 이집트군이 탱크 1천 대를 거느리고 주둔하던 남서쪽 시나이반도였다. 800대의 탱크를 앞세운 3만 명의 이스라엘 지상군이 공군의 엄호 아래 물밀 듯이 쳐들어가자 이집트군은 패퇴를 거듭했다. 9일 이스라엘군은 시나이반도 전역을 차지하고 수에즈운하 동안에 이스라엘 국기인 '다윗의 별' 깃발을 꽂았다. 10일 아랍 동맹국들과 휴전협정을 맺었을 때 이스라엘 영토는 2만700㎢에서 6만8천600㎢로 늘어나 있었다. '6일 전쟁'으로 불리는 제3차 중동전이다.
이스라엘 국립문서보관소는 전쟁 발발 50주년을 앞두고 지난 18일 수천 건의 기밀문서와 사진·영상·음성 등을 공개했다. 모두 15만 쪽 분량으로 전쟁 전후 36차례 열린 안보내각회의 내용, 정부 부처 간에 주고받은 전보, 미발표 정부 문서, 주요 인사의 메모 등이 들어 있다. 역사가들은 이스라엘 정부의 개전 의도와 작전 계획, 미국·영국의 개입 여부 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올해는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 국가를 건설을 약속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6일 만에 세계 전사에 길이 남을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으나 평화를 보장받기는커녕 분쟁의 씨앗을 뿌려놓았다. 아랍국들의 단결을 부추겨 긴장이 고조된 끝에 1973년 4차 중동전이 터졌고,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상대로 테러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석유를 앞세운 아랍국들의 공세에 밀려 외교적으로 고립됐다.
6일 전쟁의 승부를 가른 것은 정보와 사기였다. 이스라엘의 전략은 유엔이 개입하기 전에 선제공격을 통해 속전속결한다는 것이었으므로 정보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암호 체계를 바꾸기로 한 약속을 이집트군이 제때 지키지 않아 이스라엘군 동태를 전한 레바논의 첩보를 해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도 이집트는 아랍 동맹국들의 병력 우세를 맹신해 전쟁이 시작됐다는 방송 보도가 흘러나오자 카이로 시민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두 진영 간에 사기의 차이를 말해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 유학생들이 공항으로 달려왔는데, 이집트인은 징집 통지를 피해 도망가려고 한 데 반해 이스라엘인은 자원입대하려고 귀국행 비행기 편을 끊었다는 것이다. 과장된 이야기라는 주장이 있고 전황이 이스라엘에 유리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제기되지만 2천600년간 나라 없이 세계 각지를 떠돌다가 1948년 이스라엘을 건국한 유대인들의 애국심과 단결력이 아랍 동맹국 국민들보다 훨씬 강했음을 말해주는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이를 두고 흔히 최초의 재외국민 참전이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나라에는 이보다 17년 앞선 기록이 있다. 1950년 6·25가 터지자 일본에 거주하던 동포 장정들이 "나라 없는 설움과 고통을 또다시 겪을 수 없다"며 제 몸의 안전과 창창한 미래를 내던진 채 사지로 뛰어들었다. 대학생을 주축으로 한 재일의용군 1진 69명이 미군 수송선 피닉스호를 타고 1950년 9월 13일 요코하마를 출항해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것을 시작으로 모두 642명이 참전했다. 출정식 현장을 취재하다가 입대를 결심한 신세계신문 기자 김성욱, 조카 조만철과 함께 자원한 조용갑, 막 소년티를 벗은 18세의 김교인과 조승배, 45세의 중년 병사 김순룡, 각각 병원과 자동차회사라는 안정된 직장을 포기한 강대윤과 조종규 등 가슴 뭉클한 사연도 많았다. 처음엔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이들의 참전을 불허했다가 동포들이 총사령부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고 탄원서를 보내는 등 결연한 출전 의지를 보이자 수용했다고 한다.
1952년 9월 29일 미국 CBS 방송의 조지 하먼 도쿄지국장은 재일의용군의 활약상을 보도하며 이들을 '유령부대'라고 불렀다. 재일동포들이 미군에 배속돼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것을 한국 특파원들이 확인했는데도 도쿄의 유엔군사령부가 이들의 존재를 부인하자 유령이라고 칭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군번도 없이 '일본에서 온 병사'(S.V. FROM JAPAN)라고 적힌 견장을 단 채 용감하게 싸웠다. 중국군 참전으로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유엔군이 재일의용군들을 철수 대상에 넣자 이들 중 상당수가 귀환을 거부하고 한국군 배속을 강력하게 요청해 국군의 계급과 군번을 부여받기도 했다.
재일의용군 가운데 전사자는 52명이었고 83명이 행방불명됐다. 생존자들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265명은 미군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나머지 242명은 일본이 무단출국자로 규정해 입국을 불허하는 바람에 이산의 고통과 생계 곤란을 겪었다. 전사자들은 국립서울현충원 제16 묘역에 묻혀 있다. 이들이 처음 전공을 세웠던 인천의 수봉공원에는 1979년 10월 1일 참전기념비가 세워졌으며, 첫 전투에 참가한 9월 하순에 맞춰 해마다 기념식이 열린다. 6일 전쟁 50주년과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은 것을 계기로 재일의용군들의 순국 정신을 기리면서 진정한 나라 사랑의 길을 되새겨보자고 권하고 싶다.
heeyo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