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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입문 32년만에 대통령상…'남도민요' 지킴이 손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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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입문 32년만에 대통령상…'남도민요' 지킴이 손양희

"경기민요는 양은냄비, 남도민요는 가마솥 같다"…恨 토해낸 7전8기, 창원서 국악예술단 이끌어

(창원=연합뉴스) 박정헌 기자 = 신동이라 불렸던 소녀는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나이가 돼서야 그토록 갈망하던 상패를 가슴에 품었다.


경남도 판소리보존회 회장인 국악인 손양희(49)씨는 최근 '제28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인 종합대상을 받았다.

경남도 무형문화재 제9호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 후보이기도 한 그는 이날도 내륙도시 대구에서 수궁가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지성이면 감천일까. 7전 8기. 8번의 도전 끝에 찾아온 귀중한 결실이었다.

판소리 대통령상 수상은 경남 국악인으론 최초라 더 뜻깊다.

어릴 때부터 타고난 재능과 판소리에 대한 열정을 높이 평가받아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살았다. 그렇다고 평생 '꽃길'만 걸은 것은 아니었다.

손 씨가 국악 세계에 발을 딛게 된 것은 10살 무렵이었다. TV에서 나오는 국악방송을 보며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판소리 흉내를 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국무용을 따라 하기도 했다.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여자가 시집만 잘 가면 되는 시대는 끝났다. 여자도 자기 일을 하며 주도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피아노와 한국무용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더 마음이 쏠린 한국무용을 택했어요."

'천부적 소질이 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한국무용에 두각을 드러낸 그였다. 우리나라 최고 무용가가 꿈이었던 그에게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시련이 닥쳤다.

일찍 남편을 보낸 뒤 홀로 세 자녀를 부양하던 어머니가 사업이 어려워지며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이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무용은 커녕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이렇게 살 순 없다'는 생각에 수면제를 한 움큼 삼키기도 했다. 가난과 절망에서 손 씨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어머니의 등'이었다.

언젠가 무심코 바라본 어머니의 등에서 세 자녀를 부양하는 가장의 책임감과 외로움을 읽고 온종일 울었던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평생 우리 뒷바라지를 했으니 이제는 내 차례다'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이제는 놓았다고 생각한 국악인의 꿈도 다시 가슴에 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무료 강습소를 찾아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어디 하소연하지도 못한 채 응어리진 한을 판소리로 토해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주말엔 꾸준히 레슨을 받고 주중엔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던 손 씨는 1995년 인생의 반환점을 맞게 됐다. '제6회 대구 전국국악제' 판소리 부문에서 금상을 받은 것이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중요무형문화재 안비취 명창이 '키워줄 테니 같이 서울로 가자'고 청했다. 그런데 손 씨는 당돌하게도 '난 선생님과 달리 경기민요가 아닌 남도민요를 하고 싶다'며 거절했다.

"비유하자면 경기민요는 양은냄비와 같아요. 금방 끓어오르는 양은냄비처럼 경쾌하고 신명 나죠. 반면 남도민요는 가마솥과 같아요. 은근하면서도 묵직하게 달궈지는 게 여운이 오래 가죠. 저는 경기민요보다 남도민요를 배우고 싶었어요. 경기민요 명인인 안비취 선생님의 권유도 그래서 거절했고요."

그의 기억은 이어진다.

"당시 안비취 선생님 옆에서 같은 심사위원 자격으로 앉아 있던, '제비 몰러 나간다'로 유명한 박동진 명창이 이 모습을 보고 껄껄 웃더라고요. 안비취 선생님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죠."

이후 창원에서 생활하며 남도민요를 갈고닦은 손 씨는 각종 전국 국악대회에서 연달아 수상하며 착실히 경력을 쌓아 나갔다. 2005년 '제16회 대구국악제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는 국무총리상을 받기도 했다.

1995년 수상을 계기로 다니던 공기업에 사표를 내고 창원에 문을 연 개인 교습소는 어느새 단원 30여명 규모의 '국악예술단'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한계도 느꼈다. 경력이 쌓일수록 판소리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싶었으나 지금까지 받은 상으로는 힘이 달릴 때가 많았다.

국악인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상인 '대통령상'을 받고 더 나아가 무형문화재가 되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도 이 무렵이다.

2004년부터 대통령상 대회를 준비한 그는 서울전국전통예술경연대회, 보성 소리축제 등에 총 7번 관련 대회에 출사표를 던졌으나 모두 고배를 마셨다.

"대통령상을 받은 대구 대회는 몸이 안 좋아 '무대에 오르는 것에 의의를 두자'는 마음으로 갔어요. 그런데 예지몽이었는지 대회 전날 문재인 대통령이 꿈에 나와 제 손을 잡고 다른 정치인들과 함께 제집에 들어오셨죠. 공연할 때는 모든 걸 내려두고 편한 마음으로 했는데 덕분에 더 성공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손 씨의 다음 목표는 남도민요로 무형문화재가 된 뒤 경남에 시립·도립 국악단을 만들고 국립대학교에 국악학과를 설립하는 데 힘을 보태는 것이다.

"판소리는 몸으로 하는 연주라 할 수 있습니다. 몸에서 만물의 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죠. 흔히 말하는 '득음'의 경지도 극한의 고비를 수차례 넘기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인고의 세월을 버텨 득음해야 비로소 몸에서 만물의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한바탕 소리'를 다 해내는 그런 삶을 살겠습니다."

home1223@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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