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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의 시선] '통합'의 여성단체 근우회 창립 9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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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의 시선] '통합'의 여성단체 근우회 창립 90주년

(서울=연합뉴스) "조선에 있어서는 여성의 지위가 한층 저열하다. 미처 청산되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이 오히려 유력하게 남아 있는 그 위에 현대적 고통이 겹겹이 가하여졌다.… 근우회는 이와 같은 견지에서 사업을 전개하려 하는 것을 선언하나니 우리의 앞길이 여하히 험악할지라도 우리는 일천만 자매의 힘으로써 우리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여성은 벌써 약자가 아니다. 여성은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라." ('근우 선언문' 중에서. '근우' 창간호. 1929.5)


지금부터 90년 전인 1927년 5월27일 서울 기독교청년회(YMCA) 강당에서 항일여성단체 근우회가 창립총회를 가졌다. 회원 150여명과 방청인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진 창립총회에 이어 6월17일 발회식이 거행됐다.

일제 강점기 여성운동은 기독교를 기반으로 보수적인 여성교육계몽운동을 펴온 민족주의 계열과 급진적인 계급투쟁으로서의 여성해방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계열로 양대 흐름을 이어왔다. 이들을 통합해 하나로 조직된 최초의 본격적인 여성단체가 근우회다.

근우회는 1927년 2월 조직된 신간회의 자매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항일민족운동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열되어 진행됐다. 더욱 강력한 항일민족운동을 펼치기 위해 양분된 국내외의 항일민족운동 세력을 통합한 신간회가 조직되자 여성계에서도 여성운동 통합론이 일어났고 그 결실이 근우회였다.

민족주의 계열의 김활란·유영준·유각경·최은희·현신덕, 사회주의 계열의 정종명·황신덕·주세죽·허정숙·정칠성 등 당대의 여성 엘리트 대부분이 근우회에 참여했다. 이들은 창립 선언문을 통해 "과거의 여성운동은 분산적이었으므로 통일된 조직도 없고 통일된 목표나 지도 정신도 없어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므로 여성 전체의 역량을 견고히 단결하여 새로운 여성운동을 전개하려 한다"고 밝혔다.

근우회는 '조선 여성의 굳은 단결, 조선 여성의 지위 향상'을 강령으로 내걸었으며, 운동 목표로는 '민족적 처지의 탈피와 봉건유제 타파'를 제시했다. 즉 봉건적 굴레로부터의 해방과 일제 침략으로부터의 해방이 목표였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 각지와 도쿄, 간도, 창춘 등에 지회를 두었으며 기관지 '근우'를 발행했다. 회원은 만 18세 이상 여성으로 회비를 냈다.


근우회는 1929년 7월 열린 제2회 대회에서 교육의 성차별 철폐 및 보통교육 확장, 여성에 대한 봉건적·사회적·법률적 일체 차별의 철폐,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조혼 폐지 및 결혼·이혼의 자유, 인신매매 및 공창 폐지, 농촌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부인 노동자의 임금 차별 철폐 및 산전 산후 휴양과 그 임금 지급, 부인과 소년노동자의 위험노동 및 야간작업 폐지, 언론·출판·결사의 자유, 노동자·농민 의료기관 및 탁아소 제정 확립 등 10개 항의 수정된 행동강령을 채택했다. 당시로는 선구적인 주장들이었다.

1929년 이후 지회가 60여곳으로 늘었고, 회원 수도 같은 해 5월에는 2천971명에 이르렀다.

주요 활동은 여성문제를 주제로 한 토론회와 강연회 개최, 여성 문맹 퇴치를 위한 부인강좌와 야학운동, 여성의 기술교육을 위한 강습회 등이었다. 점차 확대되는 여공 파업,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등 학생들의 맹휴사건 등의 진상을 조사하거나 1929년 광주학생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번져간 항일학생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가들과 민족주의 계열의 여성운동가들 간 사상적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창립 당시 형식적으로나마 양 진영이 균형을 이루도록 구성되어 있었으나 1928년 임시 전국대회를 거치면서 사회주의 계열이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했다. 그 무렵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등을 중심으로 기독교 여성운동을 추진했던 김활란·유각경·최은희·황에스더 등이 근우회에서 퇴진하자 근우회는 사회주의 계열 여성운동가들이 주도하게 됐다. 이는 여성운동의 통합이라는 당초의 목표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일제의 탄압도 강도를 더해갔다. 창립대회 이후 모든 행사에 무장경관과 사복형사가 진을 치고 축문과 축사를 압수했으며 의안 토의를 금지했다. 집행위원회도 자유롭게 진행할 수 없었다. 근우회 연차 전국대회는 한 번도 제대로 치러지지 못했다. 1928년 5월26일부터 이틀간 예정됐던 제1회 전국대회는 경찰이 '의안의 불온'을 이유로 집회 허가를 내주지 않아 7월14일부터 16일까지 임시대회 형식으로 개최했다. 1930년 1월 '근우회 사건'으로 불리는 항일 여학생 만세시위 지도 사건으로 사회주의계 허정숙·정칠성·박호진·박차정 등의 간부들이 검거됐다.

여기에 자금난까지 겹쳐 1930년부터 근우회 운동에 대한 자체 비판이 높아졌으며 점차 지회 간 연계가 무너졌다.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되면서 근우회도 해산됐다. 당시 모든 여성운동 역량이 근우회로 집중되었던 만큼 여성운동계가 입은 타격은 심각했다.

이후 민족주의 계열 여성운동가들은 농촌여성 계몽운동 등에 나섰으며 사회주의 계열 여성운동가들은 공장이나 농촌으로 들어가 적색노동조합, 적색 농민조합 여성부를 조직하는 활동에 주력했다.


1920년대 조선 여성 대부분은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조혼과 같은 봉건적 관습이 남아 있었다. 여기에 식민 지배에 시달리고 있었다. 근우회 이전의 여성운동은 여성들의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운동이 대부분이었다. 민족주의 계열의 여성운동가들은 여성을 계몽, 교육하는 것이 최대 과제라고 생각했다. 반면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가들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 여성해방을 동시에 지향, 여성의 완전한 해방은 계급해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여성의 투쟁의식을 고양하는 것을 근우회 활동의 목적으로 보았다.

양 진영의 여성운동가들은 이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반봉건 민주주의 운동과 항일운동을 위해서는 통합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성운동이 이처럼 뚜렷한 목적의식 아래 단일한 지도체계 아래에서 역량을 집중해 통일적으로 추진되기는 처음이었다.

비록 5년을 넘기지 못하고 무산되기는 했지만 여성의 진정한 해방을 열망하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통합을 시도하고 힘을 모았다. 90년 전 이들의 노력은 진보와 보수가 갈등하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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