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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장태한 교수 "韓다문화정책, LA폭동서 교훈얻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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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장태한 교수 "韓다문화정책, LA폭동서 교훈얻어야"

"4·29는 재미 한인사회의 변곡점…코리언 아메리칸 새 정체성 생겨"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옥철 특파원 = "10년, 20년 후 한국의 다문화 사회를 떠올린다면 '4·29 LA 폭동'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젠 한 쪽으로 동화시키려고만 하는 정책으로는 안 됩니다."

1992년 4월 29일 발발한 LA 폭동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장태한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학(UC리버사이드) 교수는 29일(현지시간) 폭동 25주년을 맞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그는 한흑(韓黑) 갈등을 연구 주제로 1990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UC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UC리버사이드에서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재미 한인 이주사 분야의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장 교수는 "미국 주류 언론이 LA 폭동 25주년을 많이 보도했다. A&E와 히스토리채널, 스미스소니언 채널,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5개 방송이 다큐멘터리를 내보냈다. 매우 관심이 크다"고 소개했다.

그는 당시 상황부터 설명했다.





캘리포니아주 포모나대학에 있던 장 교수는 13일 간격으로 일어난 두 사건을 목도했다.

1991년 3월 3일 흑인청년 로드니 글렌 킹을 백인경관 4명이 집단 구타한 로드니 킹 사건과 그해 3월 16일 한인 슈퍼마켓에서 한인 주인이 흑인 소녀를 사살한 두순자 사건이다.

그는 "두 사건이 TV에 반복해서 방영됐다. 1년 가까이 이런 상황이 이어지자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 일보 직전까지 갔다. 그러던 상황에서 1992년 4월 29일 로드니 킹을 구타한 백인경관들에 대한 무죄 평결이 나왔다"면서 "무죄가 나오면 폭동이 터질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시한폭탄이었다"고 전했다.

장 교수는 로스앤젤레스 경찰(LAPD)의 초기 대응을 문제삼았다. 전혀 대비를 하지 않은 것은 물론 LA 도심 노르망디 애비뉴에서 폭동이 처음 일어났을 때 초기 진압을 하기는커녕 경찰력을 오히려 철수시켰다는 것이다.

여기다 미국 방송사들은 헬기를 띄워 폭동이 일어난 도심 현장을 생중계했다.

장 교수는 "마치 폭동이 일어났으니 다들 뛰쳐나오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고 돌이켜봤다.

폭동은 다음날 한인타운으로 급속히 번졌고 할리우드까지도 퍼져나갔다.

폭동으로 인한 사망자는 53명이다. 58명이라는 집계도 있다. 물적 피해는 7억 달러, 최대 10억 달러라는 말도 있다.






장 교수는 "20세기의 흑인 폭동은 20∼30년 주기로 반복됐다. 원인은 흑백의 빈부 격차, 흑인 사회의 실업률, 경찰의 과잉진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라면서 한인 커뮤니티가 폭동의 타깃이 된 것은 "사우스 LA 지역 상권을 한인이 장악하면서 흑인을 고용하지 않고 이익만 착취한다는 그릇된 인식이 만연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당시 흑인 폭동으로 전소한 한인 상점은 아예 재건하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한다.

흑인 활동가들이 특히 리쿼스토어(주류판매점)의 경우 집중적으로 복구를 막았고, 한인 상권은 급속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분위기가 바뀐 건 흑인 공동체가 한인 커뮤니티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걸 깨닫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장 교수는 "흑인들이 기저귀 하나만 사려고 해도 차를 타고 2∼3마일씩 가야 하는 상황이 닥쳐오니까 주변에서 상권을 활성화하던 한인들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면서 "이후에는 흑인 상권에 한인뿐 아니라 히스패닉, 아랍계 등이 들어오면서 인구가 다변화했다"고 설명했다.






재미 한인 이주사의 최대 비극으로 기록돼 있는 4·29 LA 폭동이 미래 세대에 전하는 교훈을 물어봤다.

장 교수는 "내가 대학에서 가르치는 한인 제자들은 그 사건을 전혀 모른다. 그들에게 역사적 설명을 할 필요가 있고, 역사적 사건을 교훈으로 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4·29 폭동은 한인사회가 변화하는 하나의 전환점, 변곡점이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1992년까지 미주 한인은 단일민족의 우수성을 최고로 쳤다. 하지만 그것밖에 없었다. 타인종과 다민족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걸 몰랐다"면서 "그 사건 이후 '코리언 아메리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됐다. 타민족 연대도 그때부터 시작됐고 미주 한인사회가 주류 사회에 진정으로 기여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장 교수는 "분열된 한국사회가 4·29에서 배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한국에서 지금의 다문화 정책은 무조건 동화시키는 쪽이다. 외국인에게 한국 음식, 한류를 가르치려고만 든다. 하지만 다문화 정책은 이중언어를 허용하고 이중문화권을 형성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고 지적했다.

oakchul@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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