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에 대우조선 책임 떠넘긴 기관들…또다른 변양호신드롬
국민연금 결정만 기다리다 줄줄이 채무재조정 '찬성표'
"책임 문제 벗어려는 '무임승차'…보신주의적 시스템의 병폐 드러내"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발등에 불이었다.
17일 밤 12시 30분, 국민연금이 대우조선해양의 사채권자 집회를 9시간 30분 남겨 놓고 채무 재조정에 찬성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다른 기관투자자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기관투자자들은 보통 의결권을 행사하기 전 투자위원회(국민연금), 투자심의회(우정사업본부) 등 내부 기구에서 의견을 모으는 절차를 거친다.
그러나 30곳에 가까운 기관투자자가 국민연금의 결정만 기다리느라 투자위원회를 열지 못하다가 아침 7시부터 부랴부랴 회의를 소집했다. 속전속결로 국민연금의 '찬성표'를 따라가는 의사 결정이 이어졌다.
17일 오전 10시에 열린 사채권자 집회 1회차의 채무 재조정 찬성률은 99.99%였다.
대우조선 채무 재조정을 위한 이번 사채권자 집회는 리스크 관리와 투자 책임 측면에서 미흡한 국내 기관투자자들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투자 손실을 어떻게 최소화할지 판단할 능력이 부족할뿐더러 결정에 따른 책임을 지기 싫어 국민연금에 결정을 떠넘기는 행태가 또다시 반복됐다는 것이다.
대우조선은 기관투자자들에 회사채 1조3천500억원 중 50%는 출자전환(채권을 주식으로 바꿔 받는 것)하고, 나머지 50%는 만기를 3년 미뤄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우조선이 P플랜에 들어가 회사채 투자 원금을 10%밖에 건지지 못할 것이라면서 "50%냐, 10%냐 선택하라"고 했다.
고객의 자산을 위탁받은 기관투자자들은 과연 채무 재조정 안에 참석하면 회사채 만기연장분 50%는 건질 수 있는 것인지, 50% 상환을 더 확실히 보장받는 방법은 없는지 치열하게 계산기를 두드려야 하는 상황이었다.국민연금보다 먼저 회의체를 열어 자체 의사 결정을 한 곳은 중소기업중앙회와 한국증권금융 두 곳뿐이었다.
그나마도 중기중앙회는 거제도의 대우조선 협력업체 대표단이 서울로 올라와 기자회견을 열고 "대우조선이 P플랜으로 가면 1천300여개 협력업체 등 조선 기자재산업 생태계가 무너진다"면서 채무 재조정안 수용을 촉구하자 일찌감치 마음을 돌린 것이었다. 증권금융이 보유한 회사채는 200억원 가량으로 규모가 크지 않다.
결국, 무대에 홀로 남은 국민연금이 총대를 메고 산업은행과 타결과 결렬 위기를 오가는 '롤러코스터 협상'을 벌였다. 최종적으로는 1천억원(대우조선의 청산 시 투자자금 회수율인 6.6%)을 담보로 잡을 수 있었다.
여기에 기관투자자들은 '프리 라이딩'(무임승차)을 한 셈이다.
나중에 이 결정이 잘못된 것으로 나타나더라도 "국민연금을 따라간 것"이라는 핑계를 대고 책임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대우조선에 투자한 기관은 자본시장의 '큰 손'인 불리는 국민연금, 우정사업본부, 사학연금, 공무원연금은 물론 신협·수협·농협중앙회 모두 32곳이다.
전북은행, 교보생명, 현대해상[001450], 하이투자증권, KB자산운용 등 은행·보험·금융투자회사에서도 회사채에 투자했다.
한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국민연금을 제외한 다른 기관투자자들의 행태를 보면, 과연 그들이 금융회사인지 의심스럽다"며 "자신들이 투자한 자산에 대한 손실을 어떻게 최소화할지는 여러 상황을 판단해 결정해야 하는데 국민연금만 바라보고 있다면, 과연 금융회사로서 자격이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 또한 '나는 책임지기 싫고 남들이 하면 따라가겠다'는 지극히 보신주의적 사회시스템의 병폐"라며 "앞으로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용한다고 하는데, 기관투자자들에게 우리 기업 지배구조 선진화의 첨병 역할을 맡겨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자의 적극적 의결권 행사를 위한 지침으로, 기업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기관투자가가 제 역할을 하도록 한다는 차원에서 도입됐다.
물론 국민연금을 따라가는 기관들의 행태를 무조건 나쁘다고 보긴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국민연금만큼 깊이 있는 검토를 할 수 있는 인력과 전문성이 부족한 기관 입장에선 국민연금을 따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장은 "각 기관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독립적 의사 결정을 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지만, 검토·분석 역량과 인적 자원 확보를 위해선 비용이 든다"며 "국민연금의 의사 결정이 벤치마크(기준점)가 되는 상황은 앞으로도 불가피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결국 기관투자자가 '선량한 관리자'로서 의무를 다했는지 고객이 적극적으로 따져 물을 수 있도록 집단소송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경서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현재 집단소송은 주가조작, 회계 분식, 내부거래 등 3가지로 한정해 제기할 수 있는 데다 승소하기가 무척 어려운 구조"라며 "기관투자자가 선관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때 책임을 충분히 물을 수 있고, 이길 가능성도 있어야 투자자에 의한 규율이 일어나게 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연기금, 자산운용사에 돈을 맡긴 이들이 자기 재산에 대한 권리를 충분히 인지하고, 운용·관리부실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물을 수 있게 하는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cho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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