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경쟁 버리고 실용외교 시도하는 이란-걸프왕정국들
WSJ "조용한 외교접촉 확대…화해 조짐 표면화"
(서울=연합뉴스) 정광훈 기자 = 중동 지역 패권을 놓고 경쟁해온 이란과 걸프 왕정 국가들이 손상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조용한 외교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통적 앙숙인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관계는 지난해 사우디가 저명한 시아파 성직자를 처형하자 성난 이란인들이 사우디 대사관에 난입, 경내에 불을 지르고 유리창을 깨는 소동을 부리면서 더욱 악화했다. 사우디와 바레인은 이란과 단교로 대응했고, 다른 걸프 국가들도 사우디 편에 섰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란과 걸프 국가들이 공개적으로는 아직 거친 발언을 주고받지만, 양측 관리들이 최근 눈에 띄지 않게 접촉을 확대하면서 잠정적인 화해 조짐이 표면화하고 있다고 28일(현지시간) 분석했다. 신문은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쿠웨이트와 오만을 방문한 것이나 사우디가 연례 메카 순례인 '하지'에 이란의 참가를 허락한 것 등을 근거로 들었다.
지난 1월에는 쿠웨이트 외무장관이 걸프협력회의(GCC)를 대표해 이란을 방문했다. GCC 6개 회원국은 관계 개선 전제 조건으로 이란에 대해 역내 간섭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사우디의 아델 알주바이르 외무장관은 지난달 이란의 입김이 강한 시아파 다수 국가 이라크를 사우디 외무장관으로는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방문했다.
사우디 전직 외교관이며 리야드에서 활동하는 정치분석가인 압둘라 알샤마리는 WSJ 인터뷰에서 메카 순례 문제 타결은 "양국 관계가 더 실용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양측이 마주 앉아 대화할 때"라고 덧붙였다.
분석가들은 이란과 걸프 국가들이 관계 개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배경으로 미국 새 정부의 대 이란 적대 정책을 지적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전임 버락 오바마 정부의 대 이란 화해 정책을 뒤집겠다고 공공연하게 외쳐왔다.
카타르의 도하대학원대학교 이브라힘 프라이하트 교수는 "오바마 정권 시절에는 이란이 걸프 국가들과 관계 개선 노력을 진지하게 벌여야 할 압박을 못 느꼈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는 것을 이란이 깨달았다"고 말했다.
국제 유가 하락도 관계 개선 압박 요인으로 작용했다. 사우디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감산 합의에 도달하려면 이란의 산유량 감축이 필요하다는 기존 입장을 지난해 11월 철회했다.
사우디가 겪은 일련의 대외 정책 실패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는 이란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겠다며 뛰어든 예멘 내전에서 발을 뺄 기회만 찾고 있다. 지난해 말 시리아에서는 이란과 러시아의 도움을 받은 정부군이 사우디가 지원한 반군을 제압했다.
수니파 왕정국가인 사우디와 시아파 공화국 이란은 아직도 가시 돋친 설전을 주고 받고 있다. 알주바이르 사우디 외무장관은 지난달 독일에서 열린 안보 관련 회의에서 "우리는 이란에 35년간 우정의 손을 내밀었지만, 이란으로부터 35년간 죽음과 파괴를 돌려받았다"며 "이런 상태를 지속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은 이란이 종파 갈등을 틈타 아랍세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고 의심한다. 또 이란이 최근 실시한 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도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로하니 대통령의 부비서실장은 지난 달 트위터 메시지에서 "기회는 구름처럼 흘러간다. 따라서 절호의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란과 걸프국가들이 외교 노력을 시작한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기회가 오래 가지 않는다는 충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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