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잦았던 '과장님', 알고 보니 보이스피싱 심부름꾼
(부산=연합뉴스) 차근호 기자 = "출근 절차를 알려드릴게요."
실직 후 백수 생활을 하던 문모(26) 씨에게 지난해 12월 '과장'이라는 직함이 생겼다.
문씨가 "알바를 구한다"고 인터넷에 올린 글을 보고 연락한 사람의 소개로 회사에 취직하게 된 것이다.
돈을 인출하는 일을 하면 된다는 말에 보이스피싱 조직인 것을 눈치챘지만 돈이 급해서인지 죄책감은 덜 느껴졌다.
그는 입사 첫날 회사 '실장님'에게 SNS를 통해서만 연락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실장님은 5가지 '출근 절차'를 숙지하도록 했다.
첫째, 수금장소를 알려주면 고속버스나 KTX를 미리 예매할 것.
둘째, 수금장소에 도착한 뒤 '장주'(통장주를 범인들이 줄여서 지칭하는 말)의 옷차림을 알려주면 우선 사람만 확인한 뒤 근처에 대기하고 있을 것.
셋째. '장주'가 은행에서 나오면 만날 장소를 미리 섭외해둘 것.
넷째. '장주'가 돈을 인출해 나오면 저(실장님)의 지시를 받은 뒤 만날 것.
다섯째, 대금을 전달받은 뒤 지시한 은행으로 이동해 무통(무통장입금)으로 3, 6, 10회로 나눠 회사로 송금하고 알려줄 것.
절차를 교육받은 문 과장은 다음날부터 전국을 누비며 출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1박2일 서울 출장은 기본이고 부산, 경남 등을 종횡무진 오가며 3개월간 심부름꾼 노릇을 했다.
범행 수법은 이랬다.
'실장님'은 전화 사기로 피해자를 속여 1∼2천만 원을 특정 통장계좌로 보내게 했다.
해당 통장계좌의 주인 역시 실장님에게 속은 피해자였다.
실장님은 대출업체 전단을 뿌려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이 연락해 오면 "통장으로 돈이 왔다 갔다 해야 신용등급이 오른다"고 속여 통장을 제공하게 했다.
통장주인들은 계좌로 돈이 입금되면 대출업체에서 보낸 것인 줄 알고 '대출회사 플래너'라고 속인 문과장에게 돈을 건넨다.
문과장은 접선 장소 등을 미리 섭외했다가 돈을 받으면 1%를 자기 몫으로 떼고 돈을 회사로 송금했다.
문과장은 한번 출장 갈 때마다 20만∼40만원을 챙길 수 있었다.
출장에서 드는 숙박료와 교통비, 식사비는 영수증을 SNS로 실장에 보내면 매번 정산해줬다.
문과장은 차량정체로 지각해 몇 번 꾸지람을 들은 것 외에는 빠지지 않고 근무했다.
최근 실장에게서 관리자로 승진 제안을 받기도 했다.
부산 사하경찰서는 보이스피싱 조직 하수인 문씨를 최근 붙잡아 구속했다고 22일 밝혔다.
통장을 제공할 것 처럼 신분을 위장해 접근한 경찰관에게 덜미를 잡혔다.
경찰은 문씨와 조직원이 주고받은 SNS 내용을 언론에 공개했다.
경찰은 문 씨 외에도 해당 조직 송금 심부름꾼인 과장이 10명 정도 더 있는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경찰은 '실장님'이라고 불리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몸통을 뒤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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