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삼일절과 34번째 벽안의 민족대표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그 당시 외국인 선교사 거의 전부가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를 꺼린 것은 사실이오. 그런데 박사는 처음부터 달랐소. 나이도 31살밖에 되지 않은 그가 어떻게 그렇게 용감하고도 침착하게 우리 편을 들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소. 다른 외국인은 흉내도 못 낼 노릇이었소. 난 늘 박사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위해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인 것 같이 느껴왔소."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최연소이자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갑성 초대 광복회장이 선교사이자 수의학자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를 회고한 글이다.
내일(3월 1일)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기미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만세운동을 벌인 지 98돌이 되는 날이다.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못지않게 크게 기여한 인물이 스코필드였다. 당시 그의 활약을 지켜본 이들은 그를 푸른 눈의 34번째 민족대표라고 불렀다.
1889년 3월 15일 영국에서 태어난 스코필드는 1907년 캐나다로 건너가 토론토대 수의과에 입학했다. 1910년 소아마비를 앓아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하는 시련을 겪었으나 1911년 수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6년 올리버 에이비슨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의 권유 편지를 받고 그해 11월 조선 땅을 밟았다. 세브란스 의전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하며 1년 만에 선교사 자격 취득을 위한 한국어 시험에 합격했다. 석호필(石虎弼)이란 한국식 이름도 지었다. 스코필드와 발음이 비슷하면서도 한자로는 '돌[石]처럼 굳은 의지와 호랑이[虎] 같은 강인함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弼]'는 뜻이어서 그를 부르는 사람도 좋아하고 스코필드 자신도 매우 만족했다고 한다.
3·1운동을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시에 알고 있던 외국인은 스코필드가 유일했다. 세브란스 의전 출신으로 평소 친분이 있던 이갑성이 2월 5일 스코필드를 만나 거사 계획을 알리며 해외 정세를 물어보자 그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평화 원칙 14개조와 1차대전 종전 후 열리고 있던 파리 평화회의 등을 담은 외국 신문을 전해주었다. 이갑성은 삼일절 전야 스코필드에게 독립선언서를 건네며 영어로 번역해 미국 백악관에 전달해줄 것을 당부했고, 당일 아침에도 찾아와 그날 오후 열릴 시위 사진을 찍어 해외에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탑골공원, 종로, 덕수궁 앞에서 벌어진 만세 시위의 사진을 찍어 해외에 전하는가 하면 일본인이 운영하는 '서울 프레스'와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차이나 프레스' 등 영자신문에 글을 실었다. 서대문형무소와 대구형무소를 방문해 고문 흔적을 확인한 뒤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조선 총독과 정무총감 등을 항의 방문해 비인도적 만행 중지를 촉구하기도 했다.
만세운동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져가던 그해 4월 경기도 화성군 장암면 수촌리와 향남면 제암리 등에서 일제가 학살극을 자행하자 스코필드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열차와 자전거를 번갈아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4월 18일 제암리와 수촌리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이를 토대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보고서를 작성해 해외에 보냈다.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현장 사진들은 대부분 그가 일본 경찰 몰래 찍은 것이다.
일제의 눈엣가시가 된 스코필드는 1920년 4월 사실상 강제 출국돼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도 꾸준히 편지를 띄워 조선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1926년 일시 방한하기도 했다. 그는 1958년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다시 내한,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고아들을 돌보고 가난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가 하면 민주화와 반부패 운동에도 앞장서는 등 한국과 한국인을 향한 헌신적 태도는 변함없었다.
특히 삼일절을 맞아 신문에 기고한 글들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큰 울림을 준다. "이기주의와 부패 속에서 낡은 싸움을 벌여야 할 건가, 아니면 봉사와 희생의 3·1정신을 따라야 할 건가 결단해야 한다."(1963. 2. 28 동아일보), "기념식이 아무리 웅장하고 동상이 장엄하더라도 기념식과 동상만으로 3·1정신을 살릴 수 없으며, 사랑과 정의의 행동이 없다면 3·1정신은 쓰러져갈 것이 분명하다.(1969. 3. 1 동아일보), "한국인은 3·1운동과 같은 정신적 운동을 언제나 전개해야 한다. 내가 모든 친지의 만류를 무릅쓰고 한국에 온 것은 이러한 운동의 지지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1969. 3. 1 중앙일보), "1919년 젊은이들과 늙은이들에게 진 큰 부채를 잊지 마라. 한민족은 때로 항거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혼까지 잃고 만다."(1970. 3. 2 동아일보)
한국 정부는 1960년과 1968년 스코필드에게 각각 문화훈장과 건국훈장(국민장)을 수여했고, 1970년 그가 숨지자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책 한 권, 구두 한 켤레까지 주위 사람에게 나눠주고 재산 모두를 보육원과 YMCA에 헌납했다.
1919년 어느 날, 수원에서 경성(서울)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부유한 차림의 한 노인이 맞은편에 앉은 서양인 선교사에게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소"라고 물었다. 선교사는 "당신이 교회에는 올 수 있을지 모르나 2천만 조선 동포에게 사죄하기 전에는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오"라고 일갈했다. 뜻밖의 대답에 당황한 이는 을사오적 가운데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이완용이었고, 그를 당당하게 꾸짖은 이는 스코필드였다.
지난 21일부터 오는 3월 9일까지 서울시청 신청사 1층 로비에서는 스코필드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일제의 만행을 기록한 '꺼지지 않는 불꽃' 타이핑 원본, 그가 찍은 현장 사진, 친필 서한, 유품 등이 선보인다. 삼일절을 앞두고 전시장을 둘러 보니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매국의 길을 걸으며 부귀를 누린 한국인과 부유한 나라에서 건너와 식민지 백성을 도우며 청빈하게 산 외국인의 삶이 뚜렷하게 대비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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