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상' 세운 정태기 병원장…"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더라"
실내·개인 건립 첫 사례 "나라 힘 잃으면 어린이·여성이 가장 피해"
(김해=연합뉴스) 최병길 기자 = "가슴 뛰는 대로 마음 먹었습니다."
경남 김해시 서울이비인후과의원 정태기(57) 원장은 소문난 실천가다. 생각한 것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스타일이다.
정 원장은 27일 '평화의 소녀상'을 자신의 병원 안에 세웠다.
전국 60여곳에 소녀상이 있지만 모두 실외에 있고 실내에 세운 것은 처음이다.
정 원장이 소녀상을 병원에 건립한 것은 "스스로 용서를 받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집회와 운동 등이 계속됐지만, 그동안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2011년 12월 14일 1천번째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소식을 듣고 소녀상 건립을 결심했다.
그렇게 수년간 건립을 다짐하다 지난해 9월 지역에서 활동하는 변재봉 작가에게 소녀상 제작을 요청했다.
마음 속에 품어왔던 생각을 마침내 실천으로 옮긴 것이다.
그의 '실천력'은 이미 지역사회에서 정평이 나 있다.
2002년 창원에 병원을 설립한 후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 장애인들 인공와우 이식수술을 지원해 이들에게 소리를 찾아줬다.
가난한 네팔에 지은 학교만 지금까지 7곳에 이른다.
그는 사단법인 '지구촌교육나눔'을 세워 지금도 학교 한곳을 네팔에 짓고 있다.
2015년 네팔 지진 때는 국내 의료진 중 가장 먼저 필수 의약품 등 구호품까지 손수 챙겨 가 현지에서 헌신적인 의료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병원 내 소녀상 설치는 성격이 많이 달랐다.
일부 지인들은 소녀상 설치를 둘러싼 논란을 걱정했다. 일부 환자 유치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충고도 들려왔다.
하지만 정 원장은 흔들림 없이 건립을 결심했다.
소녀상 건립비 1천300만원은 전액 정 원장이 냈다.
정 원장은 "솔직히 건립비용은 4천만∼5천만원이 필요한데 소녀상을 만든 변 작가가 재료비만 받고 나머진 재능기부를 했다"고 말했다.
변 작가도 정 원장의 병원 내 소녀상 건립 결심을 듣고 흔쾌히 동참했다.
소녀상 설치 소식이 알려지자 성금도 모였다.
정 원장은 모인 성금을 모두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돕는 단체에 기부하기로 했다.
5개월 만에 탄생한 소녀상 모습도 다소 특이하다.
한복을 입은 단발머리 소녀가 앉은 전신상인데 정작 의자는 없다.
앉고 싶고 앉으려 하지만 앉지 못하는 소녀 모습이다.
이 모습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음을 표현했다.
소녀는 오른손을 꽉 쥐고, 왼손은 펴고 있다. 꽉 쥔 손은 분노를, 편 손은 용서와 화해를 각각 의미한다.
정 원장은 "소녀상 설치 후 주변 걱정은 기우였다"고 밝혔다.
병원 찾은 환자나 일반 방문객 대부분이 뜻밖에 만난 소녀상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봤다.
교육 효과도 컸다.
부모와 함께 병원을 찾은 아이들은 소녀상에 관해 물었다. 부모는 아이 눈높이에 맞춰 소녀상을 둘러싼 아픈 역사를 설명해줬다.
정 원장은 "병원 분위기가 한결 더 경건해지고 일에 임하는 직원들의 몸과 마음가짐도 달라졌다"며 말했다.
그가 소녀상 설치 후 기대한 바람 그대로다.
정 원장은 "외국을 다녀봐도 나라가 힘을 잃었을 때 어린이와 여성이 가장 피해를 본다"며 "우리가 힘을 잃으면 이런 아픈 역사를 겪는다는 점을 가까운 이웃들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들(일본)은 잊고 싶을 것이고 잊을 수 있지만 우리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며 소녀상이 갖는 의미를 재삼 강조했다.
정 원장은 병원 안에 설치한 소녀상 자체는 아무런 정치성이 없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병원을 찾은 이들이 아픈 우리 역사를 잊지 말고 함께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평화의 소녀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choi21@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