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의 외교관계 단절로 내달리는 말레이시아 '열차'
총리·장관 등 북한 비난 총공세…北 반응 주목
(쿠알라룸푸르 서울=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김보경 기자 = 말레이시아가 북한과의 외교관계 단절까지도 작심한 기색이 역력하다.
수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13일 발생한 김정남 피살 사건은, 베트남·인도네시아 여성을 포섭한 북한 기관원들의 소행이 분명해 보이는데도 시신 신원확인은 물론 부검에 반대하며, 말레이시아 주권 침해성 발언을 이어가는 북한에 단단히 화가 난 모양새다.
15일 쿠알라룸푸르 종합병원 영안실에서 진행된 시신 부검을 방해하며 막무가내로 시신 인도를 요청한 데 이어, 외국 여성 2명을 행동대원으로 내세우고 뒤에서 조종한 북한 용의자 8명의 신원이 드러났는데도 오히려 엉터리 수사라며 말레이 경찰을 공격하자 말레이 정부와 국민이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태도로 대북 압박에 나섰다.
특히 강 철 말레이 주재 북한대사가 20일 "말레이 경찰의 수사 결과를 믿을 수 없으며, 말레이 정부가 한국과 결탁해 거짓 선동을 하고 있다"고 강변하자 분노가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는 21일 강 대사의 말이 "전적으로 부적절하며 외교적으로 무례했다"고 포문을 열었다.
이어 세리 나스리 아지즈 말레이 문화관광부 장관은 23일 북한을 '깡패국가'(rogue nation)로 비난했다.
이날 세리 히사무딘 후세인 말레이 국방부 장관은 "어떤 범죄사건이건 발생한 국가의 법에 따라 수사돼야 한다"며 "그런 점을 볼 때 북한대사가, 대사의 의무에서 탈선해 도를 넘었다는 데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며 "나에게 이건 외교적 반칙이며, 북한대사는 이번 사안에 대한 발언이 무례했다"고 지적했다.
이날 말레이시아 연립정부를 주도하는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청년위원회와 말레이시아화교연합회(MCA), 말레이시아인도회의(MIC) 등도 북한대사관을 방문해 항의 서한을 전달했다.
이들은 북한이 말레이의 주권과 사법권을 침해했다면서 "허용할 수 없는 선을 넘어 말레이시아를 모욕했다"고 성토했다.
이런 가운데 말레이 당국은 최악의 경우 북한과의 외교관계 단절 카드도 고려하고 있어 보인다.
로이터는 말레이 고위 정부관리를 인용해 강 철 북한대사를 '외교상 기피인물'(persona non grata)로 지정해 추방하고 평양 주재 말레이 대사관 폐쇄, 양국 간 비자면제협정 파기 등도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실 말레이 당국의 이런 초강수 대응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이 말레이 주권 지역에서 북한 정권의 치밀하고 조직적인 계획에 따라 독살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도 북한이 '발뺌'과 '생떼'로 일관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런 주권침해를 묵인할 경우 말레이 국내에서는 물론 국제적인 망신을 살 것으로 우려하고 있어 보인다.
북한의 시신 확인 불응으로, 큰 장애가 생겨 더는 수사를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것도 말레이의 초강수 대응을 부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북한이 망자(亡者)가 '김 철'이라는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레이는 신원확인 차원에서 김 철의 DNA 샘플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고 있다.
말레이는 김정남의 베이징 거주 본처 소생 아들과 마카오 거주 둘째 부인의 소생인 한솔·솔희 남매와 접촉해 DNA 샘플을 구하려 하고 있으나, 이들은 중국의 보호를 받고 있어 말레이 단독으로는 뜻을 이룰 수 없다.
말레이가 시신을 부검해 독극물 테러로 인한 사망이라는 결과를 도출한다고 하더라도, 시신 신원확인이 안 된 상태에선 그 결과를 밝혀 북한을 압박할 수 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 북한과 중국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이번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은 사실상 쉽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말레이는 북한과의 외교 갈등과 대립을 불사하고 가족에게 시신 인도 우선권을 주겠다며 공개적으로 마카오 거주 김정남 아들 김한솔의 방문을 공개적으로 요구해왔다. 김한솔 방문을 통한 DNA 검사로 친자확인이 된다면, '김 철'이 아닌 김정남임을 증명할 수 있으며, 그걸 바탕으로 북한 정권이 저지른 김정남 독극물 테러극을 만천하에 공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말레이-중국 간 복잡한 관계 등을 고려할 때 말레이가 단독으로 진실규명의 뜻을 이루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말레이는 자국은 물론 국제적인 여론에 호소해 진실을 규명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해가고 있다.
나집 라작 총리에서부터 정관계까지 극단적인 북한 비난에 나선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말레이가 북한을 향해 총공세에 나선 가운데 혹시 있을 지도 모를 양국 간 외교관계 단절 여부의 키는 북한이 쥐고 있어 보인다.
북한이 말레이에 맞서 '마주 달리는 열차'에 오르면 양국이 상대국 주재 대사관 폐쇄까지 가는 외교단절이 현실화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한 현지 소식통은 "강철 대사를 추방할 수 있다는 정부관리의 경고는 정부를 계속 비판한다는 것을 전제로 했지만, 말레이시아로서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북한과의 교류를 통해 얻을 게 별로 없기 때문에 외교관계 단절의 실행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meola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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