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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천 칼럼] 공자의 정명(正名)에 비춰본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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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천 칼럼] 공자의 정명(正名)에 비춰본 대한민국

(서울=연합뉴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귀국 일성으로 '진보적 보수주의자'를 자처했을 때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말 자체가 너무 낯설고 뜻도 모호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국내 정치현실에서 어느 쪽을 지향하는지가 선명하지 않았다. 사실 '진보적 보수주의'는 언어 사용에서 금기시되는 형용모순에 가깝다. '뜨거운 얼음'이나 '사각형 바퀴'와 비슷하게 비현실적이다. 그 연장선에서 확장된 개념이 아마 '제3지대 텐트'인 것 같다. 정치공학적으로 보면 보수와 진보 양 진영에서 구심력이 약한 세력을 끌어모으겠다는 구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눈에 반 총장의 '제3지대'는 또 하나의 '어중간'에 불과했다. 그 결과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반 전 총장의 중도하차는 말(言)의 실패에서 싹을 틔워 정체성과 비전의 실패로 종국을 맞았다.



허황하고 거짓된 말로 국민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지도자는 외국에도 적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트럼프가 말로 논란을 빚은 사례는 일일이 거론하기가 구차스러울 정도다. 트럼프가 직접 말한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 취임식 참가 인원을 과장하는 데 쓰인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은 반 상식적이라는 측면에서 그 중 백미다. 취임식 참가자가 오바마 전 대통령 때보다 훨씬 적었다는 언론 보도를 반박하면서 백악관 측은 왜곡된 허위정보를 인용했다. 그러고는 언론이 그 사실을 지적하자 '대안적 사실'이라고 억지를 부려 웃음거리가 됐다. 그래도 취임사에서 트럼프가 직접 언급한 '위대한 미국(Great America)'이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비교하면 그 정도는 약과다.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 만들겠다"면서 그 비전으로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취임하자마자 거의 매일같이 쏟아진 반 이민, 반 인권 정책들은 트럼프가 말한 위대함의 허구성을 백일하에 드러냈다. 불법이민을 막는다며 3천141Km의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고, 테러 용의자에 대해 물고문을 다시 허용하고, 테러 위험을 이유로 중동 및 아프리카 7개국에 '무슬림 밴(ban·입국금지)'을 강행하겠다고 나선 순간 미국은 위대함과 가장 거리가 먼 나라가 됐다. 트럼프가 선거 기간 내내 입버릇처럼 외친 '미국 우선주의'는 결국 극단적 이기주의와 흡사한 '미국 독단주의'의 위장 버전이었다.



전 세계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도, 발단은 부도덕한 정치인들의 선동 발언과 현실 왜곡이었다. 이들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는 외국인 이민 유입에 불만을 가진 중·하층민들의 반발 정서를 자극해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가 통과되도록 했다. 이들은 브렉시트의 단점만 부각시키고 장점에는 입을 닫아 많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렸다. 뜻밖의 브렉시트 통과를 목도하고 비로소 포퓰리스트들의 주술에서 깨어난 영국인들은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지?'라며 회한의 비명을 내질렀다.하지만 광란의 '말 잔치'와 군중심리에 취해 섣부른 선택을 한 결과는 비참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사흘 뒤 영국 하원 홈페이지에서 재투표 지지 서명을 한 시민이 350만 명을 넘어섰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민주주의 종주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공자가 논어에서 설파한 핵심 사상 중 하나가 '정명(正名)'이다. 제나라 경공이 이상적인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답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또 정치를 하면 무슨 일부터 하겠느냐는 제자 자로의 질문에 '이름을 바로잡는 일', 즉 '정명'이라고 했다. 공자는 '모난 술잔이 모나지 않으면 그게 모난 술잔이겠는가'라는 선문답 같은 말도 했다. 그게 무슨 '공자님 말씀'이냐 할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곱씹을수록 새삼스러운 깊은 뜻이 있다. 임금이 임금다워야 한다는 말은 역으로 임금답지 못하면 임금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이름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 '실(實)'을 갖추도록 요구하고,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다는 당위론이기도 하다. 정명은 또 '실'에 부합하게 이름을 붙이라는 교훈도 담고 있다. `보수'가 아닌 것에 얄팍한 수식어를 덧씌워 '보수'인 척하거나, '불의'에다 독단적인 억지 논리를 분칠해 '정의'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말이 올바르게 사용되고 '명'과 '실'이 부합해야 정치도 잘 되고, 사회도 안정된다는 뜻이다.



공자의 '정명'을 거울 삼아 우리의 현실을 비춰보면 부끄러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름을 바로잡으라는 단순한 금언이 2천5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득도한 고승의 죽비처럼 정수리를 내리친다. 굳이 '최순실 국정 농단'을 입에 올릴 필요도 없다. 그게 아니어도 우리의 현실은 너무 어둡고 어지럽다. 자리마다 이름이 있을 테지만 제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이 요구되는 사회지도층일수록 그런 상궤 이탈이 심하다는 것은 국민 입장에서 비극적인 역설이다. 바야흐로 조기 대선 국면이 달아오르고 있다. 다음 대권을 노리는 주자들은 지금부터라도 이름에 부합하는 처신을 했으면 좋겠다.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한 대권 도전인지를 되돌아보는 게 그 첫걸음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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