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의 시선] 민초들의 애국심, 110년 전 국채보상운동
(서울=연합뉴스) 1907년 1월29일 대구의 출판사 광문사 특별회의장. 하급 관리인 경무관 출신으로 을사늑약에 항거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까지 당했던 사장 김광제와 대구의 보부상 출신으로 독립협회 활동에 앞장서온 부사장 서상돈이 회의장에 모인 청중들 앞에서 담뱃대와 담배쌈지를 부숴버리면서 금연을 선언했다. 석 달 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고 그 담뱃값을 모아 나랏빚을 갚는데 보태겠다는 것이었다. 2천만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이 석 달 동안 담뱃값을 모은다면 한 사람이 월 20전씩 60전을 절약할 수 있으니 이를 모으면 나랏빚을 갚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본격화된 일본의 차관 공세는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노골화되어 1907년 현재 대한제국이 짊어지고 있는 외채가 1천300만원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대한제국 1년 예산에 버금가는 액수로, 대한제국의 재정을 일본에 완전히 예속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거액의 국채는 국고로는 상환이 불가능한데 갚지 못할 경우 장차 3천리 강토는 일본에 넘어갈 것이니 2천만 동포가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200여명의 청중이 공감해 그 자리에서 금연을 선언하고 의연금으로 총 2천여원을 갹출했다. 이것이 시민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이었다.
3주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2월21일 김광제·서상돈 등을 중심으로 대구민의소 즉 단연회가 설립되고 창립총회에서 500원을 모금했다. 이 날짜 대한매일신보에는 김광제·서상돈 연명으로 '국채천삼백만원보상취지서'가 실렸다.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 민족언론의 지원에 힘입어 이 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고종도 2월27일 금연을 선언했으며 일부 고급 관료들도 소극적이나마 참여했다.
이 운동은 고관이나 부유층이 아니라 일반 서민 대중이 중심이 되어 진행됐다. 나라의 덕을 제대로 보지 못한 힘없고 천대받던 계층들이 나라에 어려움이 닥치자 제일 먼저 일어나는 특이한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학생, 교사, 불교, 천주교, 기독교, 천도교 등 종교인들도 참여했지만 시장의 짚신장수, 콩나물장수, 술장수, 떡장수 같은 영세상인들도 한푼 두푼 애써 번 돈을 아낌없이 냈다. 양반집의 상노, 바느질하는 침공들이 몇 푼 안 되는 품삯을 몽땅 바쳤는가 하면 백정·노동자·인력거꾼도 서럽게 번 돈을 내놓았다. 의연금 중에는 걸인이 구걸한 푼돈도 있었다. 나무하는 초동들도 땔나무 판 돈, 짚신을 삼아 판 돈을 보탰다. 가난한 농민이 소를 팔아 10원을 출연한 일도 있었다. 심지어 충주 경무서 죄수들이 짚신을 삼고 절식을 해 의연금을 보낸 사례도 나왔다. 어린이들까지 세뱃돈, 심부름값을 낼 정도로 전 국민의 성원과 지지를 받았다. 당시 최하류층에 속하던 기생들도 서울·평양·진주 등지에서 모금운동을 전개했고 앵무라는 기생은 지화 100원을 내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여성계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을 최초의 조직적인 근대여성운동으로 평가한다. 여성도 국가의 구성원이므로 국민 된 의무에는 남녀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자각을 바탕으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해 2월23일 대구 여성들은 남일동에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결성하고 전국의 부녀자들에게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발표했다. 여성들이 조직적으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첫 사례다. 격문은 남자들이 이 운동을 시작하면서 여성을 논외로 하고 있는데 격분, 전국의 여성들에게 분발해 일어날 것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의 여성들이 가락지, 비녀, 은장도 등 금·은·패물을 내놓고 품삯, 바느질삯을 보탰다. 밥 한 공기를 반 공기로 줄이고 반찬을 줄여 절약한 돈을 망설임없이 내놓았다. 국채보상운동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28개 여성단체, 17개 준여성단체가 스스로의 힘으로 조직되어 활동했다.
이 운동은 애국계몽단체, 여성단체, 언론기관 등을 중심으로 범국민적으로 전개됐다. 각종 토론회, 강연회가 이어졌으며 민족언론들은 앞다투어 지역별 모금 상황과 관련단체들의 활동을 전하고 신문사로 답지하는 의연자 명단을 실었다. 또한, 논설을 통해 국민의 참여를 호소했다. 일본에서 어렵게 공부하던 유학생 800여명이 유학생 총회를 개최해 모은 의연금을 보냈으며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하와이·블라디보스토크 거주 한인들도 이역만리에서 피눈물나게 번 돈을 보탰다.
이준 열사는 헤이그 특사로 떠나기 직전까지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의장으로 맹활약을 펼쳤으며 안중근 의사와 모친 조마리아 여사가 의연금과 패물을 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일본 통감부와 친일파들의 교란 책동, 민족언론과 핵심단체들에 대한 탄압으로 1907년 말을 전후해 이 운동은 핵심 동력을 잃는다. 특히 일제가 이 운동의 선두에 나섰던 대한매일신보의 영국인 사장 베델과 총무 양기탁에게 보상금 횡령 혐의를 씌워 양기탁을 구속한 일은 비록 양기탁이 무죄 선고를 받기는 했으나 운동의 순수성에 타격을 주었다. 사실 국채보상운동은 처음부터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조급한 마음에 의연금 갹출 만을 호소했을 뿐 거둬들인 돈을 일본에 보상하는 구체적인 방안도, 일제 통감부의 예상되는 탄압책동과 국내 분파세력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해놓지 않았다. 국민은 부지런히 성금을 내놓았으나 운동 지도층은 국민의 애국적 열의를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한계로 국채보상운동은 1908년 여름께 사그라지고 만다. 1천300만원의 모금 목표에는 턱없이 모자랐지만 1908년 7월 의연금은 20여만원에 달했다. 한푼 두푼 국민의 진심을 담은 이 피땀 어린 돈은 어떻게 됐을까. 모금액 일부는 1923년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재정적 기초가 됐다. 안타깝게도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좌절되면서 이 돈은 일본제국에 흐지부지 삼켜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뜨거운 애국심과 민족의식, 독립사상은 1919년 3.1운동과 그 후의 항일투쟁의 밑거름이 됐다. 90년 만인 1997년 IMF 사태 당시 국민의 금 모으기 운동은 국채보상운동의 기억에 힘입은 바 크다.
올해는 국채보상운동 110주년이고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2천472건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여부가 결정되는 해이다. 이는 국채보상운동 취지문, 보고서, 회문이나 통문 같은 연락문, 영수증, 기록장부 등과 언론에 실린 관련 기록물들이다. 오는 6월부터 7월까지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 회의에서 이 기록들의 등재 여부가 판가름난다.
국가가 어려운 시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민초들이 힘을 모으는 DNA가 우리 민족에게는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처럼 혼란스러운 시기 국민의 마음이 하나로 모여야 할 때 110년 전 우리 조상들의 애국심, 그러나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지도층의 무능함, 무책임함을 보며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물론 또 다른 국채보상운동이 필요한 상황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정신만큼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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