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 반도체 호황으로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실적 눈높이가 빠르게 높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글로벌 기업 대비 저평가 받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 키옥시아와 대만 TSMC,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AI 수요 확대와 장기 공급계약, 미국 증시 접근성 등을 앞세워 높은 주가수익비율(PER)을 인정받고 있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사상 최대 수준의 이익 전망에도 상대적으로 낮은 배수에 머물고 있다.
29일 한국경제신문에 따르면 한화투자증권이 블룸버그 전망을 바탕으로 비교한 자료를 보면 글로벌 주요 반도체 기업의 12개월 선행 PER은 TSMC 23.1배, 마이크론 11.2배, 키옥시아 10.6배로 집계됐다. 반면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각각 6.6배, 6.0배에 그쳤다. 해외 3사 평균과 비교하면 SK하이닉스는 약 56%, 삼성전자는 약 60% 할인받고 있는 셈이다. PER은 주가를 주당순이익(EPS)으로 나눈 값으로, 기업이 벌어들이는 이익 대비 주가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밸류에이션 지표다.
올해 예상 PER 기준으로 격차는 더 벌어진다. TSMC는 24.4배, 마이크론은 18.3배, 키옥시아는 106.6배로 제시된 반면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각각 8.6배, 6.3배 수준이다.
영업이익 규모는 반도체 '투톱' 국내 기업들이 앞서는 상황이다. TSMC와 마이크론, 키옥시아 역시 AI 수요 확대를 바탕으로 사상 최대 수준의 실적을 이어가고 있지만, 영업이익 규모만 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오히려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증권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 컨센서스(증권사 전망치 평균)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매출액 컨센서스는 169조3,762억원, 영업이익은 85조5,118억원으로 집계됐다. 영업이익 전망치도 362조원 수준까지 높아졌다. SK하이닉스 역시 2분기 영업이익은 63조1,532억원, 매출액은 82조5,827억원으로 전망됐다.
TSMC는 올해 2분기 영업이익이 약 270억달러(약 40조원), 키옥시아는 약 1조2980억엔(약 12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마이크론은 회계연도 3분기 영업이익 약 52조원을 기록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이달 들어 한화투자증권과 다올투자증권은 각각 SK하이닉스의 목표 주가를 430만원, 420만원으로 제시했다. 글로벌 투자은행(IB) 중에서는 노무라증권이 500만원으로 가장 높은 목표 주가를 내걸었다.
박준영 한화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SK하이닉스에 대한 목표주가를 430만원으로 대폭 상향하며 "글로벌 반도체 종목 중 2026년 선행 주가수익비율(PER)과 12개월 선행 PER 기준 10배 이하의 멀티플을 부여받고 있는 종목은 단 하나도 없다"면서 "심지어 동사와 완벽히 같은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마이크론마저도 이제 선행 PER 10배 이상을 부여받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증권가는 시장이 단순히 이익 규모보다 이익 지속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TSMC가 높은 몸값을 인정받는 이유도 엔비디아 등 AI 반도체 고객사의 최선단 공정 생산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어 장기간 안정적인 이익 증가가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생산능력이 이미 수년치 예약될 정도로 공급이 부족한 만큼 단순한 경기 사이클보다 구조적인 성장 기업으로 분류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마이크론은 메모리 기업이라는 점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가장 직접적인 비교 대상이다. 최근 실적 발표에서 AI 서버용 메모리와 HBM4 공급 확대를 바탕으로 시장 예상치를 웃도는 실적을 냈고, 현재까지 16개의 장기공급계약(SCA)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향후 모든 목표 계약이 완료되면 전체 매출의 약 40%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박준영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 가운데 올해 예상 PER이나 12개월 선행 PER이 10배를 밑도는 종목은 단 하나도 없다"며 "국내 메모리 업체들은 오랜 기간 이익 확장기에도 PER 10배를 넘지 못하는 한계를 가져왔는데, 이는 감익기(실적이 감소하는 시기)의 극심한 이익 감소와 그로 인한 실적 변동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여전히 메모리 경기순환주라는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외에도 모바일, 가전, 파운드리 등 다양한 사업이 함께 반영되는 사업 구조도 순수 AI 반도체 기업 대비 할인 요인으로 꼽힌다.
저평가를 해소할 변수로 ADR 상장을 주목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오는 7월 10일 미국 시장에 직접 상장하면 마이크론과 동일한 투자 무대에서 비교 받게 되는 만큼 밸류에이션 재평가가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김운호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SK하이닉스가 미국 시장에 직접 상장함으로써 마이크론 대비 낮았던 밸류에이션을 극복하게 되면 국내 주식에 적용되는 밸류에이션도 차별화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면서 "국내 시장에서도 ADR 수준의 밸류에이션이 반영되면 추가 상승 여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국과 일본의 메모리 회사가 미국 자본 시장을 두드리자 증권가에서는 삼성전자의 ADR 상장 가능성도 점치고 있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본부장은 "최근 해외 투자자 미팅에서 삼성전자의 미국 ADR 상장에 대한 관심과 문의가 예상을 크게 상회했다"며 "다수의 해외 투자자들은 ADR 상장 현실화 시 삼성전자 주가 상승의 강력한 촉매 요인이 될 것으로 주목하는 분위기였다"고 분석했다.
이어 "글로벌 투자자의 접근성 확대 차원에서 미국 ADR 상장이 유력한 자본 정책 옵션으로 평가되며, 향후 관련 논의가 점증할 것으로 전망한다"면서 "현재의 저평가 상태와 우호적인 시장 여건을 고려할 때 미국 ADR 상장은 배제하기 어려운 시나리오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