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과의 지정학적 경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중국이 중동 걸프 지역에서 금융 영향력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대규모 대출을 앞세워 존재감을 키우는 모습이다.
23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은행들이 페르시아만 연안 걸프 지역에 대출해준 규모는 157억달러(약 23조0,000억원)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 대비 약 세 배 수준으로, 역대 최대 기록이다.
해당 수치는 양자 간 대출을 제외한 것으로, 대출 자금은 대부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에 집중됐다. 반면 같은 기간 미국·영국·유로존 은행들이 걸프 지역에 공급한 대출은 모두 합쳐 46억달러(약 6조8,000억원)에 그쳤다.
중국의 행보는 단순한 대출 확대에 그치지 않는다. 금융 전반에서 걸프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를 본격화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올해 들어 115억달러(약 16조8,000억원) 규모의 달러화 채권을 발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주요 중국 은행들이 주간사로 참여했다.
미중 경쟁이 격화되면서 중국 은행들은 미국 중심의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 지역 다변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석유 부국 걸프 국가로 진출하는 자국 기업 지원에 힘을 싣고 있다. 실제로 중국은 미중 관세 갈등 속에 지난해 걸프 지역으로의 수출을 늘렸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아시아 수출용 원유 가격을 인하하는 가운데 원유 구매도 확대했다.
중국과 걸프 국가 간 교역 역시 사상 최대 수준이다. 싱크탱크 아시아하우스는 지난해 11월 보고서에서 2024년 중국과 걸프 국가 간 교역 규모가 2,570억달러(약 377조2,000억원)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 수치는 2028년 3,750억달러(약 550조5,000억원)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걸프 국가의 중국 자본 의존도도 높아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저유가 여파로 재정이 적자로 돌아선 상황에서 미래 신도시 '네옴' 프로젝트 등 2조달러 규모의 경제 전환 계획을 추진 중이며, UAE는 인공지능(AI) 글로벌 허브 구축을 위해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두바이 소재 지정학 리스크 자문사 ‘게이트하우스 어드바이저리 파트너스’의 바수키 샤스트리 선임고문은 "이는 놀라운 정략결혼이다. 걸프 국가들은 중국에서 배우고 싶어 하며, 동시에 자본에 대한 접근을 바라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블룸버그는 사우디아라비아와 UAE가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경계하는 만큼, 인공지능이나 방위 산업 등 민감한 분야에서는 중국 금융권에 대한 개방에 신중한 태도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