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 도심에서 톈안먼(天安門) 광장과 이어지는 중심 도로 창안제(長安街)에는 몇 년 전까지 LG그룹의 베이징 트윈타워와 SK그룹의 베이징타워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LG와 SK는 사옥을 차례로 매각했다. 중국에서 발을 빼는 한국 대기업이 늘어나는 상황을 잘 보여준 사례다.
삼성, 현대차, 롯데 등 국내 대기업들이 최근 중국에서 고전하다 공장을 매각하거나 사업을 철수하고 있다. 유통, 화장품부터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자동차 및 부품, 배터리, 석유화학, 철강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업종에서 이런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지난 9월 중국 광저우 액정표시장치(LCD) 공장을 현지 기업에 약 2조원에 매각했다. 중국 기업의 저가 공세에 삼성디스플레이에 이어 LG디스플레이까지 공장을 매각하며 한국은 중국 내 TV용 LCD 시장에서 완전 철수했다.
삼성전자는 2019년 중국 마지막 스마트폰 공장인 광둥성 후이저우 공장을 닫았다. 한때 중국 스마트폰 시장 1위였지만 점유율이 0%대로 떨어지자 휴대전화 공장을 모두 철수하고 베트남과 인도로 생산을 이전한 것이다.
현대차는 중국 생산 거점이 한때 5곳에 달했지만, 현재 2곳만 남았다. 베이징 1∼3공장 중 1공장을 2021년 매각했고 올해 초 충칭 공장까지 3천억원에 처분했다. 창저우 공장도 가동을 중단하고 매각을 추진 중이다. 기아는 옌청에 공장 3곳이 있었지만, 현재 2곳만 운영하고 있다.
현대차·기아의 중국 시장 점유율은 이제 1%대에 불과하다. 10년 전만 해도 10%를 넘었다. 현재 현대차와 기아는 중국 공장을 수출 전진기지로 활용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현재 중국의 마지막 사업인 청두(成都) 복합단지 개발 프로젝트의 매각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 프로젝트는 사드 사태 이후 공사가 중단됐다. 매각이 마무리되면 롯데는 중국 진출 30여년 만에 현지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된다.
2017년 사드 사태에 따른 중국 정부의 한한령(限韓令)으로 한때 중국에 112개의 점포를 운영한 롯데마트는 2018년 시장에서 철수했다. 롯데백화점도 지난 6월 청두점 폐점을 끝으로 중국 사업을 종료했다.
아모레퍼시픽은 과거 중국 시장에서 고속 성장했지만, 몇 년 전부터 중국 현지 업체에 밀려 헤라, 에뛰드하우스를 철수했다. 아모레퍼시픽 중국 법인은 올해 3분기 매출이 750억원으로 42% 감소해 300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면세업계는 보따리상으로 불리는 '다이거우'(代購)의 발길이 끊기고 중국이 경기 침체가 심해지자 '큰손' 고객이 떠나가 부진을 겪고 있다.
롯데면세점과 신세계면세점, 신라면세점 모두 적자를 면치 못하고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보고서에서 중국 내 인건비 상승, 외국인 투자 기업 혜택 축소 등 여건 악화로 한국 기업이 중국 이외의 지역으로 투자를 전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지난해와 올해 중국 기업의 저가 공세에 롯데케미칼, 금호석유화학 등 석유화학 업체들이 중국 사업을 축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 내수의 빠른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가운데 중국 기업과 경쟁이 치열해지는 업종에서 중국 내 사업 구조조정과 탈중국 압력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최지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국팀 연구원은 "중국 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진 것이 국내 기업에 가장 큰 위협"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제조업 생산기지로 보자면 로컬(중국) 기업 경쟁력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 (투자의) 우선적인 고려사항"이라며 "품목마다 다르지만, 제조업에서는 잘하는 중국 기업이 많고 가격 경쟁력도 있다. 유통 역시 마찬가지"라고 짚었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 시장 내 판매 부진, 중국 업체 경쟁력 제고로 인한 경쟁 심화, 중국 내 생산원가 상승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해 7월부터 간첩 행위의 정의와 적용 범위를 넓힌 반(反)간첩법 개정안이 시행된 것도 외국 기업에 새로운 위험 요인이다.
정연승 단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중국은 정치 논리가 강한 국가다. 경제 논리만으로 중국을 파트너로 신뢰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며 "보수적인 관점으로 대비책을 준비해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