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를 둘러싼 위기론이 고조되고 있다. 반도체, 휴대폰, 가전 등 여러 사업분야에서 '2등 기업'이라는 인상이 굳어지면서다. 3분기 잠정실적이 발표된 8일 전영현 부회장은 이례적으로 투자자를 상대로 '송구하다'며 머리를 숙이기도 했다.
다만, 일각에선 본격적인 반전 시나리오를 써내려가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높아진 시장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뿐, 안정적인 성장세는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경영의 발목을 잡아온 이재용 회장의 사법 리스크도 해소될 조짐을 보이고 있어 회사를 둘러싼 그림자가 걷히고 있다는 분석이다.
▲ "영업익 4배 못 늘려 송구"…인텔과는 달라
8일 삼성전자는 3분기 잠정실적을 공개했다. 연결 기준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79조원, 9조 1000억원으로 집계됐다. 1년 전과 비교해 17.2%, 274.4% 늘었다.
이날 반도체 사업을 이끄는 전영현 부회장(DS부문장)은 이례적으로 사과 메시지를 냈다. 그는 "시장의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로 근원적인 기술경쟁력과 회사의 앞날에 대해서까지 걱정을 끼쳤다. 송구하다"고 전했다.
사과의 배경은 주가였다. 글로벌 반도체주가 고공행진 하고 있지만 삼성전자 주가는 이같은 흐름에 올라타지 못해서다. 삼성전자의 3분기 영업이익 전망치를 14조원 수준에서 10조원 내외로 낮춘 증권가의 분석도 주가 하락을 부추겼다. 단기간에 주가가 20% 이상 급락하며 투자자로부터 질타가 쏟아지자 전 부회장이 수습에 나선 셈이다.
다만, 3분기 실적은 어닝쇼크로 불리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평가다.
분기 사상 최대 매출액을 기록하며 글로벌 반도체 수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음을 방증했다. 몰락의 길을 걷는
인텔의 매출이 2022년 2분기 153억 달러에서 올해 2분기 128억 달러로 급격히 위축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 국가 대항전 된 반도체…출발점부터 뒤쳐진 삼성전자
삼성전자의 경쟁사들은 자국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반도체 시장 점유율 확보에 나서고 있다. 반면, 한국은 반도체 지원법조차 수년째 공회전 중인 상황이다.
미국 정부는 2022년부터 '칩스법'을 통해 자국 반도체 기업을 지원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에 의존하던 반도체 생산을 자국에서 해결하기 위해 인텔에 85억달러 보조금을 투입하기로 했다.
올해 4월에는 마이크론에 61억달러의 보조금과 75억달러의 대출 지원도 약속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양분하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의 주도권을 빼앗아가겠다는 포석이다.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자국 반도체 기업 SMIC에 2억7천만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고, 일본 정부는 연합 반도체 기업(라피더스)을 설립하는데 63억달러의 보조금을 투입했다.
정부의 보조금 지급은 대규모 설비 투자로, 이는 제품 단가 인하로 이어진다. 자국 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뿌리는 경쟁국가와 달리 한국은 국내 기업에 대한 직접 보조금 지급에는 인색한 모습이다. 삼성전자 반도체의 글로벌 경쟁력 약화를 회사의 탓으로만 돌리기 어려운 이유다.
여당과 야당 모두 반도체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발의한 상황이지만 여야간·당정간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장기간 방치 중이다. 고동진 의원은 7일 국정감사에서 "반도체는 글로벌 경쟁 산업"이라며
"미국, 일본, 중국은 시속 200~300㎞로 아우토반을 달리는데, 우리나라는 시내에서 정속주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이재용 사법 리스크 해소 전망…파운드리 '노선정리'
삼성전자를 향한 위기론이 고조되고 있지만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이재용 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해소될 조짐을 보이고 있어, 향후 경영 공백이 최소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점이다.
올해 초 이 회장은 삼성그룹 부당 합병 의혹과 관련해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검찰이 제시한 증거의 효력이 인정되지 않으면서다. 검찰이 항소하며 2심 첫 공판이 최근 열렸지만, 법조계에서는 무죄 판결이 나올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1심에서 장기간(3년 5개월) 심리를 거친 결과인 만큼, 핵심 쟁점을 뒤집기는 어렵다는 평가다.
검찰은 2심에서 자본시장법 같은 핵심 쟁점보다는 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바이오에피스 회계 처리가 외감법(주식회사등의외부감사에관한법률)을 위반했는지를 주로 따질 전망이다. 이 회장은 외감법과 관련한 삼성의 4개의 의혹 중 2개에 연루돼 있다.
다만, 외감법의 경우 유죄 판결이 나오더라도 징역형이 나오기는 어렵다는게 법조계 판단이다. 2심 법원이 내년 2월 전까지 선고하기로 한 만큼 삼성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막바지에 와 있다는 평가다.
현재 이 회장은 글로벌 경영 행보를 이어가며
회사의 사업 방향에 대한 노선 정리에 나서고 있다. 최근 필리핀을 방문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의 분사 계획이 없다"고 말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인텔이 부진한 파운드리 사업을 분사하기로 결정하자 업계의 관심은 삼성 파운드리에 쏠렸다. 삼성 파운드리도 TSMC에 밀려 시장 점유율이 하락하고 있어서다. 일각에서 삼성 파운드리 사업부가 분사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며 불안감이 고조됐지만, 이 회장이 이를 일축하면서 사업의 방향성이 확고해졌다는 평가다.
한 재계 관계자는 "핵심 사업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갈지 여부를 밝히는 것은 오너 경영인이 아니라면 다루기 어려운 내용"이라며 "사법 리스크를 어느정도 덜어내면서 본격적으로 회사를 진두지휘 하는 수순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남겨진 숙제 '젊은 삼성' 가능할까
앞으로 남은 숙제는 삼성이 다시 혁신 기업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여부다. 이를 위해선
젊은층으로의 세대 전환이 필수적이다.
한국CXO연구소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지난해 40대 이상 임직원 수는 8만 1461명으로 집계됐다. 20대 직원 수 7만 2525명을 앞질렀다. 2010년에는 20대 직원 비중이 55.7%에 달했지만, 2023년에는 27.1%까지 줄었다.
반면 40대 이상 직원은 지난해 8만 1461명으로 전체의 30.4%를 차지했다.
조직이 고령화되는 동안 삼성전자의 혁신 동력도 약해졌다는 게 산업계의 평가다.
회사도 이같은 문제를 인식하는 듯한 분위기다. 전영현 부회장은 3분기 실적과 관련한 사과문에서
"조직문화와 일하는 방법을 고치겠다"고 말했다. 조직문화가 결국 회사의 미래 경쟁력으로 이어진다는 인식에서다.
그는 "우리의 전통인 신뢰와 소통의 조직문화를 재건하겠다"며 "문제점을 발견하면 그대로 드러내 치열하게 토론해 개선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