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이탈 전공의에 대한 행정처분이나 집단행동 중인 의대교수들에 대한 명령 발동 등 강경 대응에 나서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의사들은 의대 교수들의 집단 사직서 제출이나 진료·수술 셧다운(휴진) 이후 정부를 압박할 대응책이 사실상 없는 상황이다.
정부와 의사들이 의대 증원 추진 여부를 선결 조건으로 내세워 대화가 성사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의정 갈등은 이달 중순 법원의 관련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는 당분간 대화도 공세도 없는 소강상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6일 정부와 의료계 등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3월 말 총선에 앞서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대한 대응 기조를 '기계적 법 집행'에서 '유연한 대응'으로 변경한 뒤 의사들에게 '대화를 할 테니 근거를 담은 의료계의 통일된 안을 가져와 달라'는 입장을 반복해서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이탈 중인 전공의들을 상대로 의견 청취를 진행해 지난 3월 26일부터는 3개월 의사면허 정지를 내용으로 하는 행정처분을 할 수 있지만, 유연한 대응을 시작한 후 관련 절차를 한달 넘게 중단하고 있다.
정부는 의대 증원이 마무리되는 단계에서 전공의들에 대한 면허정지를 강행해서 얻을 이익이 적은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가 유화책을 이어가고 의료공백에 대한 환자들의 원성 또한 높아지고 있지만, 이탈한 뒤 복귀한 전공의는 미미한 수준이다.
지난 2일 기준 레지던트 9천900여명 중 의료현장을 지키는 사례는 590명 수준이다.
정부는 면허정지 처분이 전공의들을 병원에 되돌리기보다는 의료계의 반발만 키울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면허정지 처분이 내려지면 처분의 적법성을 둘러싼 법적 갈등도 예상된다.
의료계가 응하지 않고 있지만, 계속 대화를 촉구하고 있는 상황도 강경책으로의 전환 가능성이 작아 보이는 이유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은 지난 3일 브리핑에서 "정부는 의료계와 일대일 논의도 가능하며, 형식의 구애 없이 언제라도 만나서 대화할 수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정부는 의대 교수들이 주 1회 휴진을 결정하고 집단으로 사직서를 제출한 것과 관련해 '진료유지·사직서 수리 금지' 등 명령을 내릴지 검토하기도 했지만, 이런 명령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정부 관계자는 "정부의 입장은 변함 없이 근거를 갖춘 안을 의료계가 통일해서 가져오면 얼마든지 대화하겠다는 것"이라며 "정부는 대화의 여지도 계속 열어뒀고, 대통령이 전공의를 직접 만날 정도로 성의를 보였으며, 최근에는 의대 증원 일부를 대학이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양보도 했다"고 설명했다.
정부 입장에서는 전임의(펠로)가 수련병원에 복귀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이 증원 강행 추진에 긍정적이다.
지난 2일 100개 수련병원의 전임의 계약률은 65.8%로, 지난 2월 29일의 33.6%보다 30%포인트 이상 높아졌다.
'빅5'로 불리는 서울 주요 5대 병원만 따지면 계약률은 33.9%였던 것이 68.2%까지 올랐다.
의사들은 지난주 의대 교수들이 '주 1회 휴진'을 단행하며 정부에 대해 '공세'에 나섰지만, 의료 현장에 큰 혼란은 발생하지 않고 대신 환자들의 불안감만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정부와 의료계 등에 따르면 지난달 30일과 지난 3일 대형 병원들이 진료와 수술 등에서 휴진을 했지만, 전면적인 진료·수술 중단은 발생하지 않았다.
병원은 평소와 다름없이 정상적으로 진료를 보는 환자들로 북적였고, 진료과 대부분이 정상적으로 가동됐다
큰 혼란이 발생하지 않은 것은 환자들을 외면하고 진료·수술을 하지 않은 사례가 실제로는 많지 않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교수들이 주 5회 내내 진료·수술을 해오지는 않은 만큼 관련 스케줄만 일부 조정된 것으로 보인다.
의대 교수들은 정부가 의대 증원을 확정할 경우 주당 휴진 일수를 늘리는 등의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지만, 지난주 상황을 보면 이런 강화된 조치가 정부를 움직일 만큼 파급력이 클 가능성은 작다.
의대 교수들이 지난 3월 25일부터 집단으로 사직서를 제출해 지난 25일 사직의 효력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실제 사직이 이뤄진 사례는 눈에 띄지 않고 있다. 요건에 맞게 사직서가 제출되고 병원·대학 측이 이를 받아들인 경우는 거의 없다.
의료계 내부에서는 전공의들의 집단사직과 의대생들의 집단휴직에 이어 교수들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휴진까지 한 상황에서 정부를 압박할 '카드'가 남아있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개원의 중심인 대한의사협회(의협)의 경우 집단행동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지 않은 데다, 집단행동을 하더라도 파급력이 클 만큼의 참여도가 나오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빅5' 병원의 한 교수는 "전공의들은 안 돌아올 것 같다. 그냥 이렇게 쭉 가는 수밖에 없다"며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황도 아니다. 점점 정부와 의료계 양쪽이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의협은 전공의, 의대생, 의대 교수, 의학회 등을 모두 포함한 범의료계 협의체 구성을 추진하고 있지만, 전공의단체인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박단 비상대책위원장은 논의에 불참해 의료계 내 균열도 여전한 상태다.
정부와 의사들은 이달 중순 의대증원 효력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법원의 판결이 나올 때까지 대화도 갈등 격화도 없는 이런 식의 '소강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고등법원은 의대생과 교수, 전공의 등이 의대 정원 2천명 증원·배분 결정의 효력을 멈춰달라며 정부를 상대로 낸 집행정지 신청의 항고심에 대해 이달 중순까지 결정을 내릴 계획이다.
서울행정법원의 1심에서는 '신청인 적격'이 없다며 각하했지만, 서울고법 재판부는 구체적으로 2025학년도 의대 정원이 법령상 어떤 절차를 거쳐 언제 최종 확정되는지, 증원 규모 2천명은 어떻게 도출했는지 의대 증원 근거 자료 제출을 정부에 요청했다.
항고심 재판부는 이달 10일까지 정부 측 자료를 제출받은 뒤 결론을 낼 계획인데, 집행정지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8부 능선'을 넘은 정부의 의대증원 추진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
교육부와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는 지난 2일 전국 의대가 제출한 '2025학년도 대학입학전형 시행계획'상 의대 모집인원을 취합해 공개했는데, 증원 규모는 1천469~1천509명으로 정부가 처음 발표한 증원 규모(2천명)보다는 500명가량 적다.
대교협이 변경된 모집인원을 심사해 승인하면 각 대학은 5월 31일까지 대입 수시모집 요강에 의대 모집인원을 반영해 증원이 최종 확정된다.
의사 단체들은 법원의 결정에 따라 정부의 증원 추진을 되돌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임현택 의협 회장은 지난 1일 라디오 방송에서 "서울고법에서 의대 정원을 2천명 늘리기로 한 결정의 구체적인 근거를 정부가 내놓아야 한다고 판단했는데, 그전까지는 (증원) 절차를 진행하지 말라는 뜻"이라며 "5월 말에 대학별 의대 정원을 발표하기 전에는 이 상황이 마무리돼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법원이 요구한 근거 자료 제출을 준비하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정부는 대학들을 상대로 한 수요조사 과정을 법원에 상세히 알리며 근거에 따른 증원이라는 점을 강조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