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의 인플레이션 목표 달성이 다시 미뤄지게 됐다. 지난주 미 노동부가 집계한 3월 일자리 보고서에 이어 현지시간 10일 나온 3월 소비자물가지수까지 시장 예상을 웃도는 지표가 나오면서 금리인하는 상반기 내에 기약할 수 없게 됐다. 이날 소비자물가지수 여파로 지역은행과 부동산 관련주가 폭락했고 채권금리가 20bp안팎 폭등하는 등 시장의 불안감이 짙어졌다.
10일 뉴욕증권거래소에서 S&P 500지수는 전 거래일보다 49.27포인트, 0.95% 빠진 5,160.64로 밀렸고, 나스닥도 하루 만에 136.28포인트, 0.84% 하락한 1만 6,170.36에 그쳤다. 다우존슨 산업평균지수도 이날 422.16포인트, 1.09% 미끄러진 3만 8,461.51로 장을 마쳤다.미국 국채금리는 10년물 기준 전 거래일보다 18bp 오른 4.546%로 심리정 저항선인 4.5%를 돌파했다. 2년물 국채금리도 22.6bp 폭등하며 4.973%를 기록했다. 2년물은 장중 5%를 돌파하는 등 연준의 금리인하 가능성이 사라진 뒤 위험자산 회피 심리가 짙게 나타났다.
● 말 안 듣는 브레이크…근원 물가 전년비 3.8%
미 노동통계국은 3월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월대비 0.4%, 1년 전과 비교해 3.5% 증가했다고 밝혔다. 소비자물가지수의 전월대비 상승폭은 시장 기대치인 0.3%를 웃돌았고, 연간 상승폭은 전월 기록인 3.2%는 물론 시장 전망 3.4%를 훌쩍 뛰어넘은 기록이다. 변동성이 큰 에너지와 식품가격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지수도 전월대비 0.4% 올라 월가 전망치 0.3%를 넘어섰다. 전년대비로는 3.8% 상승해 물가 상승 속도가 오히려 빨라졌다.
이날 지표는 상세 항목에서도 중고차 가격을 제외한 대부분의 항목이 예상보다 크게 악화했다. 식품 물가는 전월대비 0.4%, 에너지도 유가 상승 여파에 전월 대비 1.1% 올랐다. 시장이 우려한 서비스 부문은 의료 서비스가 전월대비 0.6%, 교통 1.5% 등 상승폭이 컸다. 자동차 보험료는 전월대비 2.7%, 전년대비 22.2%나 뛰었다.
지난 1월과 2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의 원인이었던 주거비 항목도 전월과 동일한 0.6%, 주택소유자의 등가임대료(OER)도 0.4%로 변화가 없었다. 예상보다 크게 악화한 지표로 인해 선물시장은 상반기 금리인하 기대를 완전히 포기했다. 시카고상품거래소가 집계한 페드워치(FedWatch) 기준 6월 금리 인하 확률은 16.7%로 1/3토막 났다. 선물 트레이더들은 이제 6월에도 82.8%의 확률로 현재 금리를 이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7월 금리 동결 확률도 62.3%로 치솟는 등 연내 인하 기대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
지난 금요일까지 고착화한 인플레이션에도 연내 3번의 금리인하 가능성을 주장해온 얀 하치우스 골드만삭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도 하우스 뷰를 연내 2번 인하로 고쳐 잡았다. 얀 하치우스는 이날 CNBC와의 인터뷰에서 "인플레이션 둔화에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자동차 보험 등 서비스 물가 하락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밝혔다.
● 무딘 칼자루 쥔 파월…고개드는 금리인상론
고착화하는 인플레이션을 확인한 시장 참가자들은 연준의 다음 행보로 현재의 금리 수준을 지속하거나 인상할 가능성까지 고려하기 시작했다. 블랙록의 글로벌 채권 최고투자책임자인 릭 리더는 "핵심 요소 상당수가 금리에 덜 민감한 항목"이라면서 "연준이 정책금리라고 하는 무딘 도구로 서비스 가격을 내리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릭 리더는 올해 금리인하가 빨라도 올해 말 또는 그 이후로 미뤄질 것에 무게를 뒀다.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도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슈퍼 코어(전체 물가지수에서 주거비, 식품, 에너지를 제외한 인플레이션)가 오르는 점이 우려스럽다"면서 "금리인상을 심각하게 고려할 때"라고 주장했다.
연준 내 매파 성향의 위원들은 이미 이러한 인플레이션 둔화 속도에 여러 차례 경고음을 내왔다. 로리 로건 댈러스 연준 총재는 지난 5일 "핵심적인 리스크는 인플레이션 상승이 아니다"라며 "인플레이션이 정체되어 예상 경로를 제 때에 회복하지 못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로건 총재는 이런 위험으로 인해 "금리인하를 생각하기엔 너무 이르다"고 밝혔다.
미셸 보우먼 연준 이사와 닐 카시카리 미니애폴리스 연준 총재 역시 인플레이션이 정체할 경우 금리 인하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혀왔고, 라파엘 보스틱 애틀랜타 연준 총재도 전날 "경제가 매우 견고해 금리인하가 더 멀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연준 인사들의 이러한 시각은 이날 오후 공개된 지난 3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의사록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연준 의사록에 따르면 "위원들은 높은 인플레이션의 불확실성과 최근 경제 지표가 2%를 향한 인플레이션의 지속적 하락에 대한 확신을 높이지 못하는 점을 우려했다"고 적혀있다.
시장 예상을 깬 소비자물가지수에 대해 바이든 대통령도 즉각 백악관 성명을 통해 "인플레이션은 최고점서 60% 하락했지만 할 일 더 많이 남았다"고 밝혔다. 이어 "주거비와 식료품 가격은 여전히 높다"면서 "200만 채 주택을 짓고 비용 낮출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뜨거운 인플레이션이 바이든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우려했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인들의 생활비로 인한 불만이 상승하면서 대선 경합주 7개 주의 유권자들은 지난 1년간 인플레이션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우려한다"고 전했다"
한편 채권금리 급등과 고금리로 인한 지역은행 위기 확산 우려로 이날 개별 업종 가운데 지역은행, 주택 업체들 하락이 두드러졌다. KBW 지역은행 지수는 하루 만에 5.01% 폭락했다. US 뱅코프 주가는 4.35%, PNC파이낸셜이 3.95%, 리즌스 파이낸셜 4.88% 등 중소 은행주들이 큰 낙폭을 보였다.
대형은행인 JP모건&체인스도 0.85% 내렸고, 채권 보유 비중이 높은 뱅크오브아메리카는 2.86%로 상대적으로 4대 은행 중 가장 부진했다. 주택경기 위축의 장기화와 개인들의 인테리어 수요가 줄어들 수 있다는 부담으로 인해 D.R호튼이 전날보다 6.39% 내렸고, 레너 5.76%, 풀티그룹도 5.19% 하락했다. 주택 개량용품 유통사인 홈디포도 3% 하락했다.
● 원유재고 늘었지만..이란 보복 첩보에 급등
미국 에너지정보청이 공개한 상업용 원유재고는 584만여배럴로 시장 예상 240만 배럴을 넘어섰다. 휘발유 재고가 70만 배럴 늘었고, 원유 수출량은 270만 배럴 감소했다. 또한 가격 영향이 큰 쿠싱 원유 재고의 감소폭도 17만 배럴로 직전 집계인 37만 7천 배럴 감소보다 줄었다.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이날 오전 원유 시장의 공급 증가로 인해 서부텍사스산 원유가 이틀째 하락을 보였으나,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블룸버그는 익명의 제보자를 인용해 미국이 이란의 보복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란은 지난달말 시리아 다마수크스에 위치한 대사관을 미사일 공습한 이스라엘에 대해 보복을 공개적으로 밝혀왔다.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군사 혹은 정부 목표물을 상대로 이란의 직접 공격 또는 헤즈볼라등 대리인을 통한 미사일 공격이 있을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사실이 전해지자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X(옛 트위터)를 통해 "이란이 자국 영토에 공격하면 이에 대해응해 이란에 보복하겠다"며 확전을 예고했다. 중동 내 양측간 긴장이 확산하면서 국제유가는 서부텍사스산 원유 기준 전 거래일보다 1.14% 뛴 배럴당 86.2달러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