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코로나 사태 이후 닥치고 있는 초불확실성 시대에 특히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정국 경제가 초불확실성 시대에 얼마나 잘 버틸 수 있는가는 캐나다 중앙은행이 개발한 금융 스트레스 지수(FSI·financial stress index)로 파악한다. 물리학의 피로도 개념을 응용한 FSI의 핵심은 완충능력에 있다. 한국 경제가 초불확실성 시대에 취약하다는 것은 대내외 환경변화에 따른 완충장치가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림 1> 한국 금융상황지수 추이
첫째, 경제주체를 가릴 것 없이 부채가 너무 많다. 국제통화기금(IMF) 등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대비 가계부채는 108.1%, 기업업부채는 124.1%로 위험수위를 넘어선지 오래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가채무 증가속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GDP대비한 절대수준도 IMF의 수정된 개념 상 위험수준인 60%에 근접했다.
더 우려되는 것은 국내 금융사들이 마치 유행처럼 해외 부동산 투자 과정에서 급증한 달러 레버리지 부채다. 2023년 4분기부터 만기가 집중적으로 시기에 고금리와 맞물리면서 ’수요 파괴‘까지 일고 있다. 이 현상이 나타날 때는 리스케줄링과 투자자산 처분이 어렵고 처분하더라도 국내 금융사처럼 중후순위로 밀려난 조건에서는 회수하기가 어렵다.
둘째, 펀더멘털 면에서는 저성장 고착화가 우려될 정도로 약하다. 2022년 1인당 국민소득은 아시아 4룡 가운데 마지막 남은 대만에게 추월당했다. 2023년 성장률은 일본에게 역전당해 ’제2의 경술국치‘라는 자조적인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경술국치란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의해 우리의 국권이 상실당한 치욕적인 사건을 말한다.
단순생산함수(Y=f(L,K,A), L=노동, K=자본, A=총요소생산성)로 추정한 중장기 성장기반은 더 취약하다. 노동 섹터는 ‘저출산·고령화’, 자본 섹터는 해외 위주의 신규 투자로 낮은 자본장비율(K/L)과 토빈 q 비율’, 그리고 총요소생산성 섹터는 각종 입법 규제와 부정부패 등으로 빠르면 2025년부터 1%대의 성장률도 어려운 것으로 나온다.
셋째, 쌍둥이 적자 우려다. 현 정부 들어서도 재정적자와 국가채무가 좀처럼 줄지 않는 추세다. 세수는 저성장과 직전 정부와의 정책단절에 따른 금단 효과 등으로 펑크가 나고 있다. 반면 지출은 하방 경직성에다 재정준칙은 ‘거대 야당’이라는 입법적 한계에 부딪쳐 도입이 지연되면서 세수 감소 폭 이상으로 감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경상수지도 흑자규모가 갈수록 줄어들면서 조만간 적자로 돌아서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질적인 면에서도 상품수지는 ‘수출 증가’보다 ‘수입 감소’가 더 큰 불황형 흑자로 종전과 다르다. 상품외 수지는 ‘국내 유입’보다 ‘해외 유출’이 더 많은 공동화 적자가 누적되고 있어 대내외 환경변화에 따른 완충능력은 더 떨어진다.
넷째, 포트폴리오 지위가 정체돼 있는 것도 문제다. GDP 규모, 무역액, 시가총액 등으로 평가되는 실물경제 위상은 세계 10위권이지만 세계채권지수(WGBI),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지수(MSCI)로 파악되는 포트폴리오 지위는 신흥국이다. 두 위상 간 괴리에 따른 잠복된 위험은 대외가격변수가 불안할 때 노출된다.
다섯째, 극한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여야 간 갈등도 불확실성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부결 건수를 제안 건수로 나워 백분화시킨 여야 간 갈등지수는 국회 역사상 최고수준에 달한다. 텍스트 마이닝 기법으로 주요 현안에 대한 여야 의원 간의 어조지수를 보면 우리 경제가 어려울 때일수록 더 높게 나온다.
<그림 2> 한국 경제 성장경로
여섯째, 외국인을 중심으로 한국 증시의 투자환경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점도 자주 지적된다. 디스커버리, 라임, 옴티머스 사태의 책임자들은 여전히 대형 증권사의 최고경영자(CEO)를 꿰차고 있는 가운데 한국을 상징하는 금융사에서는 수천억대의 횡령 사건이 터지고 있다. 테라, 루나 등 불법코인 사태 주범들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초불확실성 시대가 지속되면서 한국 경제는 저성장 국면이 길어지는 가운데 인플레 하락속도가 주요국에 비해 크게 떨어져 스테그플레이션 우려가 가시지 않고 있다. 현재 놓여있는 정책여건을 볼 때 풀어나가기도 쉽지 않다. 통화정책은 물가 부담으로 금리를 내릴 수 없다. 재정정책은 ‘거대 야당’이라는 입법적 한계로 운신의 폭이 작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총체적 복합위기까지 우려되는 한국 경제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특정국이 경기를 살리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정책 처방으로 나뉜다. 하나는 정부 주도로 재정지출을 늘리는 케인즈언의 총수요 진작책과, 다른 하나는 세금 감면 등을 통해 민간의 경제하고자 하는 의욕을 고취시키는 ‘공급중시 경제이론(SSE?supply side economics)’이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1970년대 후반까지 총수요가 절대적으로 부족할 때까지는 케인즈언식 정책 처방은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주효해 주류경제학의 위상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2차 오일쇼크 이후 세계 경제가 경기는 침체되고 물가가 오르는 스테그플레이션이 엄습하자 케인즈언식 정책 처방은 무기력했다.
고민 끝에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내놓은 정책 처방이 SSE다. 레이거노믹스로도 알려진 이 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사람은 아셔 B. 래퍼다. 래퍼 교수는 특정국의 세율이 적정수준을 넘어 비표준 지대에 놓여 때는 세율을 낮춰 민간의 경제 의욕을 고취시켜야 경기와 세수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는 ‘래퍼 곡선(Laffer curve)’을 제시했다.
SSE의 본질은 정부가 미리 짜여진 수요에 맞춰 경기를 부양하는 케인즈언 이론과 달리 경제 주체에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하고 잃어버린 활력을 어떻게 높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봤다. 이를 위해 캠플주사식 대중 영합 경기대책에 의존하기보다 감세와 규제 완화, 기술혁신 등 보다 근본적인 처방을 권했다.
그 후 40년이 지난 2020년대 들어 전혀 예기치 못했던 코로나 사태를 맞아 공급망 차질 등으로 스테그플레이션이 다시 찾아왔다. 대내적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붕괴, 대외적으로 중국의 추격 등으로 어려운 국면에서 출범했던 조 바이든 정부가 내놓았던 정책 처방이 ‘신공급중시 경제이론(NSSE·new supply side economics)’이다
NSSE의 뿌리는 바이든 정부의 실질적인 경제콘트롤 타워인 재닛 옐런 재무장관이 1999년 4월 예일대 동문회에서 처음으로 언급했던 알려지기 시작한 ‘예일 거시경제 패러다임'이다. 이 정책 처방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 사태, 2009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 그리고 2023년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와 같은 위기 국면에 적용됐다.
미국 경제의 최종 목표인 지속 가능한 성장과 물가안정, 그리고 완전고용을 달성하기 위해 물적 자본, 인적 자본, 연구개발(R&D)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 등을 강조했다. 정부는 친기업 정책을 추진해 이윤이 높아질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권고했다. 세제도 법인세 대폭 인하와 R&D 투자세액공제제도를 도입하고 소비세율을 높여 저축과 투자가 함께 늘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봤다.
실천계획도 같은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다. 법인세 최소세율 15% 등을 통해 해외에 나가 있는 미국 기업을 환류시키는 ‘리쇼오링’과 함께 당장 들어올 수 없는 미국 기업은 ‘니어쇼오링’과 ‘프렌즈쇼오링’ 정책을 병행해 동맹국으로 이전시켰다. 동일한 차원에서 외국기업과 자금도 미국으로 유치하고 동맹국으로 이전을 유도했다.
NSSE의 효과를 총공급 곡선(AgS·노동시장과 생산함수에 의해 도출)과 총수요 곡선(AgD·투자와 저축을 의미하는 ‘IS 곡선’, 유동성 선호와 화폐 공급을 의미하는 ‘LM 곡선’에 의해 도출) 이론을 통해 보면 쉽게 이해된다. NSSE 추진으로 해외에 나가 있는 미국과 외국 기업이 들어와 마음대로 뛰어놀 수 있게 되면 총공급 곡선이 우측(AgS1→AgS2)으로 이동돼 성장률이 높아지고 인플레이션율이 낮아지는 ‘골디락스’ 국면이 도래한다.
<그림 3> 총공급 곡선과 총수요 곡선
실제 성과도 눈부시다. 2022년 3분기 이후 미국 경제는 2%대의 안정적인 성장세를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2023년 3분기 성장률은 5%대까지 뛰어올랐다. 2022년 6월 9.1%까지 치솟았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년 만에 3%대 초반으로 안정돼 신경제 신화가 재현되고 있다. 중국과의 격차도 다시 30년 이상 벌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바이든 정부의 NSSE는 ‘독일판 NSSE’, ‘일본판 NSSE’ 등으로 재탄생되고 있다. 초불확실성 시대를 맞아 총체적 복합위기 우려까지 제기되는 한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뒤늦었다 하더라도 국정 아젠다는 제시돼야 하고 이를 토대로 세부 분야별 정책은 ‘한국판 NSSE’를 추진하는 쪽으로 맞춰져야 한다.
한상춘/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