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여학생 A씨는 작년 5월 학교 수업을 마친 뒤 신발장에 넣어둔 운동화를 신었다가 덧신이 축축해졌다.
A씨와 친구들은 운동화 안에 남아있는 이물질의 정체를 두고 고민하다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 조사 결과 정액이었다.
경찰이 확보한 CCTV에는 수업이 시작되고 복도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피의자가 운동화를 가방에 넣어 화장실로 갔다 돌아와 정액이 묻은 운동화를 다시 제자리에 두고 도망치는 모습이 찍혔다.
피의자 B씨는 얼마 안 돼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 중부경찰서는 사건이 일어난 지 2개월 만인 작년 7월 B씨를 서울중앙지검에 송치했다.
B씨의 혐의는 `재물손괴`였다. 성범죄로 적용할 만한 법 조항이 없어 재물손괴 혐의로 수사했다는 게 경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A씨는 직접적인 위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성범죄가 아닌 단순 손괴 피해자가 됐다. 유사 성추행으로 성적수치심을 유발했지만, 법적으로는 강제추행, 유사 강간 등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것이다.
피의자 B씨의 태도 역시 A씨를 고통스럽게 했다. 먼저 합의하자고 한 B씨는 재물손괴 혐의로 기소되자 "손괴죄로 내야 하는 벌금이 합의금보다 적으므로 합의하지 않겠다"고 말을 바꿨다. 결국 50만원 벌금형으로 약식 기소된 B씨는 끝까지 A씨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이처럼 형법에서 규정한 성범죄가 현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유형의 성추행·성희롱 사건과 괴리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형법상 강제추행 등 성범죄로 인정되려면 가해자의 폭행이나 협박 등 유형력의 행사가 있어야 한다. 성희롱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등 근로기준법 일부 법률에서 별개로 인정된다.
A씨가 겪은 피해는 이런 사례에 해당하지 않아 민사상 손해배상청구를 통해 피해 구제를 받아야 한다.
A씨는 "민사소송을 진행하려면 내 개인정보를 모두 노출해야 한다"며 "그마저도 형사재판에서 성범죄로 인정이 안 돼 손괴된 신발 물품 가액 정도만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성범죄에 대한 폭넓은 인정이 필요하다며 이런 사건을 규율할 법이 신속히 제정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미경 전국여성연대 대표는 "여성들이 성희롱에 많이 노출되고 있는데 법적 문제 제기가 어렵다"며 "이를 명백한 성범죄로 인식하고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성범죄를 가해자와 피해자 간 접촉이 있어야 발생한다고 말하는 건 성폭력의 심각성을 부인하는 소극적인 해석이다"며 "직접 만지지 않아도 언어폭력이나 자기 흔적을 남기는 것, 주거지를 찾아가는 등의 행위를 모두 성범죄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피해자의 성별이나 인적사항을 인식하고 한 범죄라면 스토킹 범죄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며 "오래전부터 발의됐던 스토킹방지법이 통과돼 이와 유사 사건은 스토킹 성범죄로 처벌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