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10년이 시작되는 올해에 예상되는 많은 변화 가운데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금융위기 극복’이라는 미명하에 돈을 무제한으로 풀었고 금리를 마이너스 수준까지 떨어뜨렸던 ‘중앙은행의 만능시대’가 끝나가는 점을 재테크 관점에서는 가장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대신 경제정책의 주안점은 ‘큰 정부론’이 국민으로부터 힘을 얻으면서 재정정책으로 넘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선도하는 국가는 미국이다. 올해 11월 대선을 처리야 하는 트럼프 정부는 경기와 증시를 부양하기 위해 도로·철도·항만 등 낙후된 사회간접자본(SOC)을 복구하는데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케인즈 이론이 태동됐던 1930년대 대공황 당시 루즈벨트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과 유사해 ‘트럼프-케인즈언 정책’이라고도 부른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새로 맞은 유럽중앙은행(ECB)도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재정이 건전한 독일 등과 보조를 맞춰 나간다는 계획이다. 일본은 ‘금융완화(하마다 고이치 미국 예일대 명예교수가 이론적 근거 제시)’ 중심의 1단계 아베노믹스를 마무리하고 2단계 ’재정정책(혼다 에쓰로 영국 대사가 이론적 근거 제시)‘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바오류(성장률 6%) 붕괴 위험에 직면한 중국은 올해 경제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작년 12월에 열렸던 경제공작회의에서 재정정책을 적극 활용해 13차 5개년 기간 중 하향 조정된 목표 성장률(6.0∼6.5%)을 달성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한국의 문재인 정부도 대외적인 통화정책 여건을 감안하면 이상 추가 금리인하는 어렵다고 보고 여유가 많은 재정정책을 활용해 성장률을 끌어올린다는 방침이다.
마치 입을 맞추기라도 하듯이 각국이 케인즈언 정책을 들고 나온 것은 위기극복 단계와 깊은 연관이 있다. 2009년 리먼 사태 직후 유동성 위기극복이 우선인 만큼 한꺼번에 3∼4 단계씩 기준금리를 내리는 ‘빅 스텝’ 금리인하와, 유동성을 거의 무제한으로 푸는 ‘양적완화’ 등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이 주가 될 수밖에 없었다.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은 빠른 시일 안에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고 실물경기를 제 궤도에 올려놔야 한다. 정책금리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금리가 너무 낮아 ‘통화정책의 무력화’ 논쟁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아직까지 제자리를 찾지 못한 경기를 부양시키기 위해 재정정책을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중요한 것은 재정정책의 효과다. 미국 하버드대의 케네스 로코프 교수와 같은 재정적자 축소론자는 국채발행을 통해 공공지출을 늘리면 국채 소화과정에서 상승된 금리로 민간소비와 투자가 감소되는 ‘구축 효과(crowding out effect)’가 발생한다고 우려한다. 오히려 바로-리카르도의 동등이론에 따르면 재정지출을 줄이면 그만큼 민간소비가 늘어나는 ‘구인 효과(crowding in effect)’가 발생해 경기가 살아난다고 주장한다(로코프 독트린).
하지만 폴 크루그먼 뉴욕 시립대 교수와 같은 경기부양론자는 지금처럼 불확실성 시대에 있어서는 중앙은행이 양적완화 등을 통해 돈을 무제한 푼다 하더라도 국채와 같은 안전자산에 들어가 경기회복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이때는 국채공급을 늘려 투자자의 안전자산 선호경향을 완화시켜주면 돈이 실물경제에 유입돼 경기회복에 도움될 수 있다고 반박한다(크루그먼 독트린).
역사적으로 재정지출 승수는 ‘1’을 상회하는 것으로 나온다. 미국 학계에서는 대부분 ‘1∼2’ 사이로 보고 있다. 미국 의회예산국(CBO)는 2.2배로 비교적 높게 추정했다. 이 때문에 금융완화와 재정적자 축소논쟁 속에 갈수록 각국이 재정정책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하는 배경이다.
경기부양론자도 재정정책이 위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종전보다 재정지출을 늘려 총수요를 자극하는 케인즈언 정책이 화려하게 부활할 가능성은 적다는 의미다. 1980년대 중반 이전 회복기에는 성장률이 각국 2∼4% 포인트 높아지면 그만큼 곧바로 고용이 늘어났다. 이 때문에 지표경기가 살아나면 체감경기까지 개선돼 재정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고 경기가 회복되자 재정적자가 축소됐다.
하지만 최근에는 재정정책으로 성장률이 높아진다 하더라도 고용이 늘지 않아 지표경기와 체감경기간의 괴리가 심해지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때 높아진 성장률만 감안해 금리인상과 같은 출구전략(혹은 긴축정책)을 조기에 추진하면 체감경기는 더 악화된다.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도 달러 강세와 함께 이 점을 우려해 기준금리 인상에 적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작년 7월 이후 세 차례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반대로 체감경기를 개선하기 위해 재정지출을 오랫동안 지속하다 보면 재정적자 누적과 인플레이션 등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특정국에서 동일한 시점에 인플레이션(재정 인플레이션이라 부른다)과 디플레이션 요인이 공존하는 ‘바이플레이션 문제로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한 과제다.
다행인 것은 미국 경제정책 역사상 경기부양과 재정적자, 인플레이션을 함께 풀어가 성공한 사례가 많다. 1990년대 후반 빌 클린턴 정부가 추진해 재정과 물가안정 속에 높은 성장률을 기록해 ‘신경제’ 신화를 낳았던 .‘페이-고(pay-go)’ 원칙이다. 이 원칙은 재정지출 총량은 동결하되 지출내역에 있어 부양효과가 적은 쪽은 삭감(pay)하고 그 삭감분으로 부양효과가 높은 쪽으로 밀어(go)주면 경기가 회복되고 재정적자도 축소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기업인 출신답게 트럼프노믹스 추진으로 우려되는 재정적자는 민간자본을 참여시켜 이런 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 추진했던 ‘BTL(Build Transfer Lease·민자 사업)’ 방식과 유사하다. 전제조건인 수익률 보전은 대체투자가 대세인 만큼 오히려 인기를 끌 것이라는 시각이다.
트럼프노믹스 추진에 따라 우려되는 또 하나의 문제인 재정인플레이션도 감세정책으로 충분히 방지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2차 오일쇼크 여파로 ‘스테그플레이션(경기침체에 물가가 올라가는 현상)’이라는 정책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운 미국 경제를 구해냈던 1980년대 초반 ‘레이건노믹스’을 연상케 하는 감세정책을 발표했다.
감세정책의 이론적 토대인 ‘래퍼 곡선(Laffer Curve)’을 보면 세율과 재정수입 간 정(正)의 구간을 ‘표준 지대(normal zone)’, 부(負)의 구간을 ‘비표준 지대(abnormal zone)’라 부른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출마 이전부터 너무 높아 경제효율을 떨어뜨리는 세 부담을 낮춰줘야 경기가 살아나고 재정수입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봤다.
감세 정책으로 재정인플레이션 우려를 완화시키는 것은 총공급 곡선(AgS·노동시장과 생산함수에 의해 도출)과 총수요 곡선(AgD·투자와 저축을 의미하는 ‘IS 곡선’, 유동성 선호와 화폐 공급을 의미하는 ‘LM 곡선’에 의해 도출)을 통해 보면 쉽게 이해된다. 세금감면으로 AgS가 우측으로 이동되면 성장률이 높아지고 물가는 떨어지게 된다. ‘트럼프 쇼크’·‘트럼프 트라우마’·‘트럼프 리스크’로 비교적 큰 폭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보았던 미국 증시가 트럼프 당선 이후 강한 상승세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와 함께 월가에서 가장 신뢰하는 제라미 시겔 와튼 스쿨 교수가 앞으로 미국 증시는 너무 뜨겁(급등)지도 차갑(급락)지도 않는 1990년대 후반의 ‘골디락스 국면’이 다시 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러 교수도 자신이 개발한 CAPE(경기조정주가수익비율·S&P 500 지수)로 34배로 높지만 트럼프 경제정책 기대로 조정이 쉽게 오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한상춘 / 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