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세계적인 지휘자 겸 작곡가 앙드레 프레빈이 28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8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프레빈은 피아니스트이면서 작곡가로 클래식과 재즈, 할리우드 영화음악 등 장르를 넘나들며 명곡을 남겼고 세계적인 교향악단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를 지내며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이름을 떨쳤다.
1929년 독일의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난 프레빈은 유명한 변호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일찍부터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유대인에 대한 나치 정권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그의 가족은 1938년 파리로 이주해 1년가량 거주하다 다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LA에 정착한 프레빈의 아버지는 피아노 레슨밖에는 할 일을 찾지 못했고, LA 일대의 영화 스튜디오에서 일하던 당시 17세의 프레빈이 사실상 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던 프레빈은 이 시기부터 유니버설 스튜디오, MGM 등 당시 할리우드 유명 제작사들의 영화음악 작곡·편곡을 맡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후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 13차례 올랐고 영화 `지지`(1958년), `포기와 베스`(1959년), `당신에게 오늘 밤을`(1963년)과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1964년) 등으로 4차례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았다.
클래식 음악계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자 할리우드를 떠난 그는 1967년 휴스턴 심포니의 음악 감독에 취임했고 이후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LSO), 휴스턴 심포니, LA필하모닉, 런던 로열 필하모닉 등 세계적인 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했다.
특히 LSO에서는 1968년부터 1979년까지 11년간 상임 지휘자로 지내면서 수십장의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1970년 런던 로열페스티벌홀에서 프레빈이 지휘하는 LSO와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연주해 유럽 클래식계의 스타로 부상한 인연이 있다.
1998년에는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토대로 작곡한 프레빈의 오페라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기도 했다.
영화음악에서 시작해 클래식 음악계에서 이름을 떨친 그였지만, 청소년 시절 접한 재즈 음악의 영향은 그의 음악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프레빈은 한 인터뷰에서 "나는 철저하게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았었다"며 "그러다 어린 시절 LA에서 누군가 (재즈 피아니스트) 아트 테이텀이 연주한 `스위트 로레인` 음반을 줬다. 그 음반에 나는 놀랐고 매혹됐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 작업에 관대하지 않았던 당시 클래식 음악계에서 인정받기 위해 영화음악과 재즈 음악을 의도적으로 멀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유럽 주요 악단의 지휘자를 두루 거친 이후인 1995년부터는 다시 팝 음악계로 돌아와 소프라노 실비아 맥네어와 함께 뮤지컬 `쇼 보트`의 음악과 뮤지컬 작곡가 제롬 컨의 곡들을 재즈로 재해석한 음반들을 내놨다.
평생 수차례 그래미상을 받은 그는 영화 `지지`의 주제가 음반으로 1958년 첫 그래미상을 받았고 1960년에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로 재즈 연주 부문에서 이 상을 받았다.
프레빈은 비범한 음악 인생 못지않게 평범하지 않은 사생활로도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평생 5번 결혼했던 그는 세 번째 아내였던 미국 모델 겸 여배우 미아 패로나 다섯째 부인이었던 독일의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 등 자신 못지않게 유명한 아내들과의 결혼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패로와의 사이에 3명의 자녀를 뒀고 또 3명의 자녀를 입양했는데 한국에서 입양한 딸 순이 프레빈은 이후 어머니의 남자친구였던 영화감독 우디 앨런과 교제하다 결혼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프레빈은 73세였던 2002년에는 34세 연하였던 무터와 결혼했고, 아내에게 헌정한 바이올린 협주곡 `안네소피`(Anne-Sophie) 음반으로 2005년 그래미상을 받기도 했으나 둘은 4년 만인 2006년 이혼했다.
전 부인 패로는 프레빈의 별세 소식이 알려진 직후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아침에 다시 만나요, 사랑하는 친구. 장엄한 교향곡들 가운데 잠들기를"이라고 추모 글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