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두 달 전만 해도 북한군 병사의 귀순에 총성으로 얼룩졌던 `분단의 상징` 판문점이 대규모 북한 예술단의 방남 경로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북한은 15일 열린 남북 실무접촉에서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 북한 예술단 140여 명의 방남 경로로 판문점을 경유해 서울-평창까지 육로로 이동하는 방안을 거론하면서 남측에 수송수단 등의 편의 제공을 요청했다.
판문점을 통해 140여 명이 한꺼번에 내려오는 건 이례적이다. 정부는 유엔군 사령부와의 협의를 거쳐 판문점을 통한 북한 예술단의 육로 방남을 확정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예술단의 방남인 만큼 큰 문제가 없다면 이들의 판문점 경유는 성사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판문점에는 출입경 시설이 없지만, 유엔사의 협조가 확보된다면 남북 간 사전협의로 해결 가능하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북측이 출입경 시설이 대규모로 갖춰진 경의선 육로 대신 판문점을 선택한 배경도 주목된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한 북한 방문단의 행보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상황에서 대규모 예술단이 판문점을 넘는 모습을 연출해 파견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김용현 동국대 교수는 16일 "판문점은 정치적 상징성이 워낙 큰 곳"이라며 "예술단의 판문점 경유를 통해 북한이 평화를 존중하는 정상적 체제라는 메시지를 국제사회, 특히 미국에 발신하려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개성공단 출입경에 주로 이용되던 경의선 육로의 경우 개성공단을 남측이 끊은 상황에서 우리가 요청하면 몰라도 먼저 (방남경로로) 택하고 싶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통일부에 따르면 판문점을 통해 남북이 오간 사례는 1998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 500마리를 몰고 방북했을 때가 대표적이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민간인이 판문점을 통과한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1985년 남북이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 151명씩 서울과 평양을 교환방문할 때도 판문점을 거쳤고, 1984년 남측에 큰 수해가 났을 때는 북측이 판문점을 통해 지원물자를 보내기도 했다.
1989년에는 임수경 전 의원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로 평양에 갔다가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1990년 9월 서울을 방문한 1차 남북고위급회담의 북측대표단과 같은 해 10월 서울을 찾은 남북통일축구 북측선수단 등도 판문점을 통과했다.
2003년 경의선과 동해선 도로가 뚫린 이후부터는 남북 간 인적·물적 왕래가 그쪽으로 집중돼 굳이 판문점을 이용할 이유가 없었다. 2010년 8월 한상렬 목사 등 불법으로 방북했던 인사가 귀환하거나 표류중 구조된 북한 어민들이 송환될 때 가끔 이용되는 정도였다.
드물기는 하지만 미국 정부 인사들도 방북 시 판문점을 거친 적이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1차 북핵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94년 6월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도 판문점을 이용했다. 2007년 9월 북한과 핵시설 불능화 방안 협의차 방북한 미국 대표단도 판문점을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