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서 기자] 어떤 역할을 만나도 제 옷을 입은 듯 꿀꺽 소화해내는 배우가 있다. 오랜 무명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낸 그는 바로 배우 유연석. 악역부터 순정남까지 두루 섭렵한 그가 이번에는 여심을 꽉 쓸어담는 매력적인 능글남으로 돌아왔다.
영화 `그날의 분위기`는 한 번 찍은 여자는 다 넘어오는 맹공남 재현(유연석)과 철벽녀 수정(문채원)의 하룻밤을 그린 이야기. 정 반대의 두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 영화, 예고편부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바로 처음 만난 여자에게 "저 오늘 그쪽이랑 자려고요"라던 재현의 발칙한 대사 때문.
발칙한 대사, 발칙한 소재. 맹공남과 철벽녀의 로맨스를 그린 이 영화는 사실 지금보다 더 `진했다고`. 그는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날 것 같은 대사와 상황들이 많았다. 그런데 여러 가지 조율을 하다보니 새빨간 색으로 시작했던 영화가 어느새 핑크빛으로 변해있더라. 그렇지만 대본의 첫 느낌이 신선했고, 결코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중간점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지금의 `그날의 분위기`다"라고 설명했다.
영화 `연애의 목적`과 `비포 선라이즈`의 어느 중간쯤을 달려가는 이 작품. 극중 귀엽고 사랑스러움을 담당하는 것이 수정(문채원)이라면, 재현(유연석)은 그 반대다. 여자의 마음을 알아도 너무 잘 아는 바람둥이, 그래서 여심을 공략하는 세심한 장면들이 왕왕 등장한다. 이런 장면 연출에는 유연석의 지분도 꽤 된다고. "사소한 디테일들이 결국 여성 분들의 마음을 열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작품 안에서도 그런 부분을 살리려고 많이 노력했다. 바나나 우유에 꽂은 빨대 비닐봉지 윗 부분을 남겨두거나,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매표소 직원의 이름을 불러주거나 하는 장면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세심한 바람둥이, 여기에 능글맞은 매력은 덤이다. 그간 반듯하고 깔끔한 이미지의 역할을 주로 맡아온 유연석은 그래서 이번 캐릭터가 더욱 끌렸다고. "지금까지 도전해보지 않은 캐릭터라서 더 해보고 싶었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능청스러움이 영화 중간 중간에 잘 녹아들었다고 생각한다"던 그는 `의외로 잘 어울린더라`던 주변인들의 반응을 얘기하며 꽤 즐거운 듯 보였다.
그러나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가 가진 한계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부분. 통통 튀는 첫 만남, 뻔한 스토리의 행진. 이에 대해 유연석은 "앞의 신선함들을 후반부까지 기대하다보면 조금 실망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뻔한 장면들을 신선한 대사로 채워보려고 많이 노력했고, 수미상관의 결말로 꽤 센스있는 마무리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또 큰 틀에서 보기 보다는 장면 하나 하나에 들어간 작은 디테일들을 따라가면서 본다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다"며 "재현과 수정의 감정선도 사소한 부분에서 점차 발전되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밉지 않은 바람둥이 재현. 그렇지만 현실에선 그저 한낯 나쁜 남자일 뿐인 캐릭터를 밉지 않게 그려낸 데에는 유연석의 이런 세심한 노력이 일조했다.
`재현`이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꽤 성공적으로 연기해낸 유연석. 그는 최근 본 영화로 `내부자들`을 언급하며 이병헌이 맡았던 안상구 캐릭터에 관심을 보였다. "그동안 악역도 하고 순정남도 해왔지만 기본적으로 깔끔하고 단정한 이미지를 기반으로 캐릭터를 맡아온 것 같다"던 그는 흐트러지고, 내려놓을 수 있는 허술한 캐릭터를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의 무대에 서고 있는 유연석은 공연에 대한 갈증도 내비쳤다. "초등학교 학예회에서 처음으로 무대의 매력을 알게 됐고, 이후 대학에 와서도 공연 장르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는 리얼리즘을 향해간다면 무대는 그보다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조금 더 과감한 시도들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내가 잘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계속 새로운 캐릭터와 장르, 활동 범위를 넓혀가는 도전을 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래서 쉬는 시간도 반납하고 뮤지컬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다"라고 말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지치지 않을 수 있다던 유연석. 쉬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매번 같은 걸 하게 되면 질릴 수 있는데 새로운 도전들을 작게나마 찾아가고 경험하려고 하니까 덜 지치는 것 같다. 일 자체에 대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덜 지치면서 일할 수 있다"던 그에게서 진심이 묻어나왔다.
인터뷰 전부터 피곤한 기색이 엿보였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매력이 그에게는 있었다. 최근 이태원에 바를 오픈했다는 그는 친한 지인들과 만날 수 있는 아지트를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혼자 있는 것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 성격이다. 지인들과 혹은 팬들과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바를 오픈하게 됐다"던 그는 종종 만나는 팬들과의 일화를 언급하며 즐거운 기색을 내비쳤다.
술을 좋아하냐는 물음에는 고개를 저었다. 술 보다는 술자리의 분위기를 더 좋아한다던 그는 "분위기를 많이 타는 것 같다. 그래서 그날의 분위기를 찍게 됐나"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한편으로 취미생활이 많기로도 유명한 그는 "새로운 경험들을 계속 해보고 싶다. 취미생활을 하다보면 파생되는 다른 경험들을 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지만, 배우로서 작품에 쏟았던 집중을 다른 분야에 쏟아내면서 여과시키고 환기시킬 수 있는 과정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렇게 하나 둘 시작하다보니 취미생활이 꽤 많아졌다"고 말하며, 가장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으로 `여행`을 꼽았다. "여행하면서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이번에도 뮤지컬이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다. 가서 눈도 보고 직접 운전도 하고, 또 사진도 찍으면서 즐기고 싶다"
한 시간 남짓 진행된 인터뷰를 통해 본 유연석은 세심하고 배려심 넘치는 사람이었다. 오랜 무명의 시간을 거쳐온 그는 분명 지금 이 순간의 감사함을 잊지 않고 있었다. 10년의 무명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 유연석, 그의 앞으로를 더욱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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