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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의 다툼과 포스트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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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서 만나는 어린이 그리고 문화] 19편. 어린이들의 다툼과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우리가 사는 사회를 이제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의 시대라고 부른다. 사실, 영×유아 교육 안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대의 많은 이들이 이 사상에 대해 주목하고 있으며, 앞으로의 사회는 이를 바탕으로 새롭게 나아가게 될 것이라면, 교육자로서 그리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주목해 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포스트 모더니즘 사상은 메시지를 주고받는데 있어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이 메시지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다를 수 있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지, 틀릴 수 있지’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이나 의견 자체에 대해서 수용하는 입장을 취한다. 즉, ‘다양성’과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세상에는 불변의 한 가지 진리가 있다’라기 보다 한 가지 사건에 대해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을 모두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윤리적인 측면까지 강조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늑대가 들려주는 아기돼지삼형제(1998)

이해를 돕기 위해 동화 한 편을 소개하려고 한다. 제목은 위에 나온 것처럼 ‘늑대가 들려주는 아기돼지 삼형제 이야기’이다. 이 동화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기돼지 삼형제’를 대한 포스트모더니즘 관점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같은 사건을 아기돼지 삼형제의 관점이 아닌 늑대의 입장과 목소리를 통해 사건의 새로운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

늑대에 의하면 그 사건이 있었던 날 늑대는 아주 심한 감기를 앓으면서도 할머니 생일 케잌을 만들고 있었다. 때마침 설탕이 떨어진 늑대가 돼지형제들네 집으로 설탕을 구하러 갔지만, 불친절하고 퉁명스런 돼지들은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이때 감기에 걸린 늑대가 재채기를 하자 집이 날아갔고 이 사고로 돼지들은 죽게 된다.

늑대는 그저 누워있는 햄버거를 먹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돼지들이 집에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설탕을 빌려주기 싫어 문을 열지 않았다는 돼지들의 윤리적인 측면에 대해 지적하며 자신의 입장을 하소연?한다. 그는 다만 우연히 나온 재채기로 인해 사고가 난 것은 유감이지만 돼지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 있는 돼지들을 먹었을 뿐’이라고 말이다.

돼지가 나쁘니 이제는 늑대편 들기?

이 동화는 제목만 봐도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하지만, 지금까지 돼지들이 들려주는 아기돼지 삼형제 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있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늑대에 입장에 있어 사람들이 돼지들 이야기만 귀 기울였기에 얼마나 억울했을까? 그 억욱함을 우리는 이제 알게 되었다.


자 이제 새로운 국면을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 우린 늑대 편을 들어야 할 차례이다. 그게 왠지 공평해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게 공평한 일일까? 그것이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 것일까? 사실, 돼지들은 돼지가 겪은 일에 대해서 자신들의 관점을 이 사건을 바라보고 있으며, 늑대는 자신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사정을 말하며 자신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 한 명만이 옳고 다른 한 편은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서로가 다를 뿐 옳고 틀린 쪽은 있을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실제가 아닐까 한다.


상대적인 관점에서의 갈등 조율 해보기

그렇다면, 아이들이 살고 있는 교실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교실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갈등과 사건들은 서로 다른 관점과 사정 들의 결합에 의해 발생한다.
위 내용들은 아이들이 교실에서 교사에게 갈등해결을 요하며 찾아오는 사안들이다. 아이들은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내심 ‘어떻게 얘가 나에게 그럴 수가 있지?’ / ‘얘는 왜 이러는 거지?’ / ‘내가 옳고 너가 틀렸어.’라고 생각할 것이다.

위와 같은 갈등 상황에서 교사들은 잘,잘못을 따져 법원에서처럼 판결을 내려주는 방식으로, 일이 더 커지는 것을 막으며 일사천리로 해결한다. 교사들이 이렇게 발 빠르게 해결해 버리는 이유는 다양하다. 하루에도 이런 일들이 수 십 번도 일어난다는 점과 물리적 안전 상의 이유 그리고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다칠까 봐 또한, 이런 조율방식이 가장 편해서 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장에서 교사가 이런 방식을 취하는 강력한 이유는 아이들이 교사에게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찾아온다는 것이다. 나의 억울함을 알아 달라고 말이다. 그래서 내 편이 되어 달라고 아이들은 교사에게 자신의 입장을 어떠한 방식으로던 표현하며 다가온다. 그러면 교사는 헷갈리기 시작한다. ‘나는 판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래서 잘,잘못을 따져야 하는 것이지? 라고 말이다. 이것은 아이들에게서 오는 강력한 메시지이며, 교실에서뿐 아니라 가정에서 형제, 자매를 키우는 많은 엄마들이 겪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내가 법원의 판사가 아니라 교실의 교사로서 취해야 하는 태도는 무엇일까?

교사는 이러한 갈등 상황에 있어 아이들이 서로의 관점에서 상황을 이해해 볼 수 있도록 한국말을 통역해 주는 ‘상황 통역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아이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또 상대편 아이의 입장 역시 같은 방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상황을 설명해 준다. 그리고 그에 교사의 생각을 덧붙일 수 있다. 너희가 갖고 있는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도 해결될 수 있고, 또 저런 방식도 가능하다고 말이다.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몇 가지 옵션을 줌으로서 아이들은 현재 하나의 방식이 고정 불변하지 않으며 다양하게 나아갈 수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판결을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두 아이가 서로의 생각을 다시금 나누어 볼 수 있는 시간과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어떨까? 이런 기회를 통해 아이들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교사가 판결을 내려줌으로서 사건이 빠르고 깔끔하게 처리되지는 않을 수 있고, 이로 인해 교실 내의 잡음이 많아질 수 있지만 아이들은 서로의 생각을 조율해 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 자체로 의미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은 토의 문화가 자리 잡지 못하는 곳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성인’의 우리들은 성장 과정에서 이런 경험을 많이 갖지 못했기 때문에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의견을 이야기 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구나 라고 받아들이기 보다 내 생각에 반기를 든다는 감정이 마음 속에 자리잡아 있는 듯 하다. 이렇게 성인인 나 자신의 모습만 보아도 아이들이 하는 교실에서의 경험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이는 어리지만 아이들에게 있어 교실은 작은 사회이며, 이는 보다 넓은 사회와 비교했을 때 규모(스케일)은 다르지만 아이들에게 있어 질적으로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교사들이 어깨가 더 무거워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 시기의 이 아이들이 언젠 가는 이 시대를 이끌어갈 주인공들이며, 현장의 교사들은 자신들이 이 사회를 살아갈 시민들을 키우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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