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일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중심가에 있는 코펜하겐메인도서관.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그림책 시리즈 <비텔로>를 빌리겠다고 했더니 대출은 무료지만 세금으로 작가와 삽화가에게 3.3367크로네(약 671원)가 지급된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300쪽짜리 성인소설을 빌리면 작가에게 35.453크로네(약 7133원)가 돌아간다고 한다. 정부가 공공도서관의 대출 건수에 비례해 작가·삽화가·번역가에게 보상금을 주는 공공대출권 제도다.
덴마크인이 ‘도서관 머니’라고 부르는 이 제도는 창작 활동에 대한 보상을 통해 창작자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1946년 도입됐다. 지난해 2억1208만크로네(약 440억원)의 예산을 썼는데 시민의 불만은 전혀 없다. 동화책 작가와 소설가, 시인 등 창작자가 있어 시민이 누리는 혜택에 비하면 2억크로네는 적은 돈이라는 것이다.ADVERTISEMENT
공공대출권 제도는 유럽의 복지 강국이 어떻게 ‘사회적 연대’를 통해 전체 구성원의 이해관계를 정렬시키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국민소득 4만달러 진입을 코앞에 둔 한국은 어떨까. 여전히 남의 손해가 나의 이익이 되는 ‘제로섬 사회’라는 평가가 많다. 그러다 보니 창작 같은 무형의 가치에 제대로 된 보상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독자는 맘껏 빌려 읽고 작가는 정당한 몫 받는데 한국엔 왜 공공대출권 없나요?"
문화접근권·창작 활동 동시 보장…"도서관, 서점 경쟁자 아닌 파트너"
문화접근권·창작 활동 동시 보장…"도서관, 서점 경쟁자 아닌 파트너"
“도서관은 서점의 경쟁자가 아니라 파트너죠. 사람들이 다양한 종류의 책을 접하고 읽을수록 책도 더 많이 사게 마련이니까요.”ADVERTISEMENT
덴마크 코펜하겐 시내에서 어린이 전문 책방 미라켈서점을 운영하는 리스베트 엘레베크 닐센 대표는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무료로 책을 많이 빌릴수록 서점은 손해 아니냐’는 질문에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닐센 대표는 한국에 공공대출권 제도가 없다는 데 더 놀랐다고 했다.
덴마크는 1946년부터 세계 최초로 도서관이 보유한 작가의 장서 권수와 대출 건수에 따라 작가에게 매년 보상금(도서관 머니)을 지급하는 공공대출권 제도를 운영한다. 원래는 인구가 600만 명에 불과한 덴마크의 독자적인 문학 시장을 지키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 이제는 독자와 창작자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키는 효과적인 제도로 인정받아 유럽, 호주, 뉴질랜드 등 33개국에서 공공대출권을 도입해 운용하고 있다.
시장 관점에서 보면 책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서점으로서는 밥줄을 위협하는 제도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전국 도서관에 신간이 100권 소장돼 있으면 판매 실적이 6권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예상과 달리 닐센 대표는 독서 생태계가 커질수록 서점 매출도 오르는 만큼 도서관과 서점은 공생 관계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신진 작가와 삽화가를 지원하지 않으면 아무도 어린이를 위한 책을 쓰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건 제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이라고 했다.
인구가 600만 명에 불과한 덴마크에서 동화책 작가를 포함한 대다수 창작자의 삶은 만만치 않다. 덴마크 대형 출판사 폴리티켄리터러리에이전트의 루디 우르반 라스무센 선임문학에이전트는 “시장이 협소하다 보니 전업 작가는 20~30명에 불과하다”며 “대부분의 작가는 직업을 따로 갖고 있으면서 여가 시간에 글을 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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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정도 다르지 않다. 한국 그림책협회의 2023년 조사에서 작가의 63.6%는 그림책 한 권 인세와 저작권료로 연간 500만원도 벌지 못했다. 89.2%는 ‘창작 수입이 부족해 부업을 한다’고 답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대출권은 덴마크 문학 창작자의 저변을 유지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한다. 지난해에는 창작자 총 1만28명이 1인당 평균 2만1035크로네(약 422만원)를 받았다. 덴마크 인기 그림책인 ‘비텔로 시리즈’의 작가 킴 푸프스 오케손은 가장 많은 77만8693크로네(약 1억6100만원)를 ‘도서관 머니’로 벌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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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수령액이 60만크로네를 넘으면 일부를 감액한다. 이렇게 마련한 재원을 1572~6285크로네씩 나머지 수령자에게 나눠준다. 인세만으로도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스타 작가에게 보상금이 몰리는 것을 막고 다수 작가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공공대출권 제도 운영을 담당하는 마스 헬무트 뵈길 덴마크문화·궁전청 홍보담당관은 “디지털 콘텐츠 비중이 커지는 흐름을 반영해 최근에는 전자책과 오디오북의 보상 기준을 강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단순히 창작자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효과만 있는 것도 아니다. 라스무센 에이전트는 “공공대출권 제도를 통해 탄탄한 전문 창작자 저변을 확보한 덕분에 덴마크 범죄소설은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아 세계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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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펜하겐=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